"나야, 진숙이..."
"어머, 얘..."
진숙.
대학 1학년 여름방학때, 난생처음으로 내가 장례식장에 가보게 된 것은 진숙이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치약냄새를 풍기며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던 그 아이.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오전 9시 20분.
"거기 지금 한밤중 아니니? 잠 안자고 웬 전화야?"
"호호...나 지금 서울이야. 이틀전에 왔어."
"근데 이제야 전화하니?"
"미안, 그렇게 됐어."
"면목동이겠구나? 엄마는 건강하시지? 너 없는 동안 자주 찾아뵈려고 생각은 했는데, 전화만 몇번 드리고 말았네. 내가 좀 그래...미안하다, 얘..."
"알아...내가 니 사정을 모르겠니? 그래, 가을이는 잘 크지? 선배도 건강하구?"
"그래그래...전화로 이럴게 아니라 우리, 만나자."
퇴근후에 내가 진숙이 묵고 있는 호텔로 가기로 했다.
진숙은 엄마가 계시는 면목동이 아닌 마포의 한 호텔에서 지내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가을이를 유치원에 보낸 나는 12시쯤 학원으로 출근했다.
어머님의 마지막 제사날 이후 곧바로 이 곳 입시학원에서 중등부 국어강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되지는 않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있는 상태에서 직장을 찾기가 쉬운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오늘은 수업이 두 시간 밖에 안된다. 일찍 출근해서 다른 과목선생님들과 연락을 취해보면 저녁 7시쯤에 진숙에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흔쾌히 수업을 바꿔 준 과학선생님 덕에 7시30분쯤 진숙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은아야!"
진숙은 미국식으로 나를 끌어안고 제 볼을 내 볼에다 갖다댔다.
나도 흔쾌히 진숙의 볼을 장난스럽게 부벼주었다.
"김은아! 좋아보인다? 선배가 잘해주나봐?"
진숙이 창가로 나를 안내하며 말했다.
창밖으로 한강이 시원스레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넓고 고급스런 장식이 꽤 비싼 방일거라는 짐작을 하게했다.
아버지가 다른여자와 동승한 채 그렇게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진숙과 엄마는 꽤 많은 보험금을 받았고, 나와 지환선배가 결혼하던 해에 진숙은 엄마를 면목동에 남겨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었다.
"가을이가 몇살이더라?"
진숙은 테이블 위에 놓인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여섯살이야. 이젠 아가씨티가 다 난다니까."
"그래? 후후...이쁠거야. 아빠 닮아도 그렇구, 엄마 닮아도 그렇구..."
진숙은 담배연기를 훅 내뿜으며 말했다.
"응. 이뻐. 지 아빠를 쏙 빼닮았어. 걸어가는 뒷모습 보면 깜짝 놀라. 너무 닮아서 말야."
내가 명랑하게 대꾸하자, 진숙은 웃으며 두 어번 밖에 안 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힘들진 않니?"
진숙은 언니같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괜찮아...좋아...내가 택한 사람인데..."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진숙이 내 결혼의 모든 걸 알고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내 치부를 다 드러내기는 싫었다.
2년전 어느날, 보헤미안의 그 여자가 서울 어딘가로 숨어들어 살고있다는 사실을 남편의 새어머니를 통해 알았다.
그날 이후, 남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살고 있다는 말을 진숙에게 차마 할 수가 없다.
가끔은 그에게 사람을 붙여 미행을 시키기도 했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다행히 그들이 만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은 없다.
그러나 불안감은 여전히 나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다들...보고싶다...."
"가을이 데리고 오라 그럴까?"
진숙의 '보고싶다'란 말이 순간 외로워보여서, 진심으로 가을이를 보게 해주고 싶었다.
가을이는 요즘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와 율동으로 나와 남편을 자주 웃게 만들었다.
진숙도 그걸 보면 기분좋게 웃을텐데...
"아니...오늘은 너랑만 있고 싶어. 자고가도 되니?"
우리는 그날 밤새 술과 이야기로 오랜만의 회포를 풀었다.
진숙은 미국에서 결혼할 예정이라고 했다.
상대는 47세의 흑인남자. 직업은 바텐더.
진숙이 면목동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결혼식땜에 엄마 모시러 왔다가 보기좋게 쫒겨났지...후후...예상했던 일이지만...크크..."
진숙의 웃음은 어느새 울음이 되어가고 있었다.
"난 한국이 싫어. 미국서 살거야. 그사람이랑 결혼하면 영주권도 얻을거고...아! 분명히 해 두겠는데, 영주권땜에 결혼하는 건 아냐. "
"그래. 알아."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나도 진숙의 그남자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처음 미국갔을 때, 너무 힘들었거든. 그때...그 사람...저스틴이야, 이름이...저스틴이 일하는 술집에 자주 갔었어. 근데 말야...이사람이 얼마나 따뜻하던지...아니? 보스턴의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여기까지 말한 진숙은 비틀거리며 냉장고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냉장고문을 열고 맥주를 몇병 더 꺼냈다.
비틀거리며 술병을 안고 걸어오며 진숙이 말했다.
"저것보다 열배는 더 큰냉장고 속에 들어앉은 기분...도저히 몸을 데울 길 없는데...그남자의 품이 그렇게 따뜻한거야."
나는 진숙이 들고 오는 술병을 받아 테이블에 놓았다.
어둠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한강은 불빛들의 천국이었다.
"서울은 참 화려한 도시야...."
진숙은 한숨처럼 말하며 테이블위에 놓인 담배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당겨 한모금 깊게 들이마신 다음 재떨이에 비벼끈다.
시선은 여전히 한강의 불빛에 취한 채였다.
"내가 그 때...왜 미국으로 갔는지 아니?...후후...유학? 그건 핑계고..."
나는 여전히 한강쪽을 보고있는 진숙에게 물었다.
"그 때...무슨일 있었니?"
내 질문에 진숙은 깔깔 웃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거두었다.
"울 아버지...내가 죽였어..."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말도 안된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는데...머리속에 이해할 수 없는 안개가 가득차는 것을 느끼며 진숙을 쳐다보았다.
"이틀 밤낮을 울며 매달리는 엄마를 밀쳐내고...그년이 밖에서 기다린다며 집을 나서는 아빠를 내가 불러세웠어...이거 드시고 가세요...수면제를 잔뜩 갈아넣은 녹즙이었어...아빠가 집을 나간지 30분쯤 지났을까?...전화가 왔어...아빠 차가 정면충돌로 폭발했다고..."
장례식장에서 시신이 형체도 못알아볼 정도로 탔다고 누군가 쑥덕댔던 기억이 난다.
"아빠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 난 그냥...아빠가 잠들면 못나가니까...그년에게 못가니까...아빠가 그리 급하게 나갈 줄은 정말 몰랐어...흑흑...소파에 잠시 앉아서 드시라고 했는데...그럼 내 계획대로 되는 거였는데....흑흑....아빠 미안해...아빠...."
진숙은 끝내 목놓아 울었다.
그녀의 울음 속에서 나는 7년여의 힘겨운 방황을 느낄 수 있었다.
진숙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멍에를 짊어지고 미국으로 갔던 것이다.
"가을아!"
나는 가을이를 소치쳐 부르는 내 목소리에 놀라 잠이깼다.
술병을 끌어안은 채 잠이 든 진숙의 모습이 마치 마른 새우처럼 힘없어 보였다.
이른 아침의 한강은 밤과는 또다른 모습이다.
새벽 3시가 다되어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잠든 내내, 나는 이런 저런 꿈 속을 헤매다녔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녹즙을 내미는 진숙...
그것을 받아드는 진숙의 아버지는 내 남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돼....안돼....가을아 안돼...
어느새 진숙의 얼굴위로 오버랩되는 가을이의 얼굴....
엄마 딸 가을이, 착하지? 안돼...가을아! 가을아!.....
너무나 선명한 꿈이었다.
나는 잠든 진숙에게 쪽지를 남기고 호텔방을 나왔다.
<이제 일어났구나.
식구들이 걱정되서 서둘러 간다.
이해해 줄거지?
그리고...지난 밤...
나...필름이 끊겼었나봐.
몸이 예전같지 않네.
항상 건강하구...
결혼, 진심으로 축하해.
행복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