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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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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행복


BY 가우디 2005-09-06

마치, 보헤미안의 그 여자는 처음부터 세상에 없었던 일인 듯 그는 딸에게만 몰두했다. 

"나도 당신 딸로 태어날 걸 그랬어. 와이프가 아니라....."

나는 예쁘게 눈을 흘겼다.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를 사랑하는다는 사실이 기뻤다.

나의 피와 살을 나눠 가진 이 아이를 그가 사랑한다.

사랑스런 딸 가을이가, 그와 나를 묶어주는 영원한 끈이 되리라.

 

나는 시아버지의 배려로 가을이를 낳은 이듬해에 다시 복학할 수 있었고, 그가 졸업한 지 2년후엔 나도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나의 졸업사진에 나란히 서있는 우리 세사람.

영원한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았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의 요새도 가끔은 침공을 받았다.

"얘, 넌 무슨 애가 나이 스물 몇에 벌써 아줌마티를 술술 풍기고 다니니?"

"넌 좀 눈치가 없어. 그러고도 우리 지환이가 널 좋대니?"

그의 새어머니는 나를 몸종 부리듯 하며 무시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대로 죽이 잘맞는 공범자였다.

가끔씩 그녀가 내게 내비치는 알 수 없는 증오심이 보헤미안 그 여자인 듯한 착각이 들곤 해서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을 빼면 모든 것이 좋았다.

 

그날은 그의 친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유일한 시어머님 제사날이었다.

시아버지는 새어머니가 불편해 한다는 이유로 제사상을 나에게 부탁하고, 일년 중 그 날 딱 하루, 우리집을 다녀가셨다.

제사준비를 혼자하려면 오전부터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그러나 가을이를 시간제 놀이방에 맡겼고, 4년째 해 온 일이라 그다지 힘든 일은 없다.

남편과 시아버지와 가을이와 내가 한가족임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행사가 아닌가.

이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정성을 다해 제사준비를 하고 있는데 점심때쯤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수고가 많구나!"

"어머, 오셨어요?"

"왜? 내가 못 올데라도 왔니? 왜 그렇게 놀래?"

"아뇨. 잘 오셨어요."

"물이나 좀 다오."

그녀는 거만하게 집안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소파에 앉아 물잔을 받았다.

"앤 줄 알았더니, 살림은 좀 하나보네?"

그녀가 물을 한모금 들이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바로 돌아섰다.

"전 좀 바빠서요."

진짜 바빴다.

좀 있음 가을이 데려올 시간이 될거고, 가을이가 오기전에 마쳐둬야 할 일들이 많다.

"그래라."

새어머니는 감정을 억누르며 씹어삼키듯 혼자말을 했다.

"어련하시겠어? 딴년 좋다고 목숨건 놈 발목을 잡았는데, 이정도 충성은 바쳐야지."

나는 입술을 깨물며 후라이팬만 노려보았다. 

그녀는 물잔을 들고 집안을 이리저리 서성이기 시작했다.

나는 되도록 그녀와 부딪히지 않기위해 노력했다.

"어쭈? 제법이네? 이거 동그랑땡이야?"

어느새 주방으로 온 그녀는 동그랑땡이 가지런히 담긴 채반을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제사음식 그렇게 하시면......"

나는 더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무섭게 나를 노려 보았기 때문이다.

"뭐야? 이 맛?"

그녀는 씹던 동그랑땡을 채반에다 퉤퉤 뱉아냈다.

"새우 넣었어?  난 새우 싫어. 동그랑땡엔 돼지고기가 들어가야 제맛이지. 안그래?"

동그랑땡은 새우를 갈아넣어 만들었다.

돌아가신 어머님은 육류를 즐기지 않으셨다. 

결혼한 첫 해 첫 제사에서 아버님이 지나가는 말씀으로 하신 걸, 나는 그후 한번도 잊지 않았다.

한숨을 쉬었다.

'어머님, 이번 제사에는 동그랑땡이 빠져야겠네요.'

마음속으로 어머님께 용서를 빌었다.

"난 네가 제사를 안지낸다고 말했으면 좋겠어."

그녀가 드디어 내구역을 침공한 이유를 밝혔다.

"이번을 끝으로....피곤하다고 그래. 그래도 아무말 못할거야. 첨부터 네가 안지낸다고 했어도 됐어."

"그렇지만...."

"난 내 남편이 전 부인 제사에 다니는 꼴 못 보겠어. 4년이면 많이 참았잖아? 이젠 네가 그만한다고 해."

"....."

"왜 대답이 없어? 나한테 이정도도 못해줘? 네가 누구땜에 지환이랑 결혼했는지 잊은 건 아니지? 그 좋은머리 좀 굴려봐. 그리고 제대로 선택해. 죽은 년이야? 살아있는 나야?"

나는 그만 눈을 감았다.

마치 나때문에 친딸을 내치기나 한 듯한 말투였다.

새어머니라는 여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녀는 죽은 어머님께도 질투의 악담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표독한 요부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잘 생각해."

그녀는 다시 한번 다짐하며 현관을 나가려다 생각난 듯 나를 돌아보았다.

"미애년이 돌아왔어. 지환이 아무 변화없지? 아직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네? 잘 지켜. 호호호....."

그녀의 웃음은 그녀가 가고 나서도 한참을 복도에서 울렸다.

그녀는 나의 시어머니도, 그의 새어머니도, 보헤미안 그 여자의 생모도 아닌, 오직 한 여자로서 한남자를 소유하고 싶어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웃을 수 없음을 나는 안다.

그날 저녁, 제사를 지내고 나서 음복을 하는 자리에서 내가 말했다.

"저...아버님. 내년부터 제사...그만 지냈으면 하구요. 새어머님도 계신데 제가 너무 죄송해요. 또 저도 이제 일을 좀 가져야 될 것 같고...."

"은아야!" 그가 내 말을 막았다.

"아니다. 나도 진즉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가을에미도 할만큼 했어. 이제 그만 고향 제각으로 보내자. 어차피 한식에 내려가서 제를 지내니까, 문중사람들도 보고 좋지, 뭐. 그렇게 하자."

아버님은 순순히 그러자고 하셨다.

아버님이 가시고 상을 다 치울때까지도 그는 말이 없었다.

"미안해요. 낮에 새어머님이 다녀가셨어. 그렇게 싫어하는 걸, 그런 증오를 받아가며 어머님도 오시고 싶겠어요?"

그는 아무말이 없었다.

순간, 그 또한 새어머니를 보며 보헤미안 그 여자를 떠올리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새어머니 앞에선 늘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게 아닐까? 

"내가 어머님 기일마다 잊지않고 물이라도 한잔 올릴테니까 걱정말아요."

무기력한 그의 등을 싸안으며 위로했다.

그 날, 나는 밤새 뒤척이는 그를 보아야만 했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나는 새어머니와 공범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