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호! 그러니까 이 아가씨가 우리 지환이 발목을 확실히 잡긴 잡은거네?"
그의 새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여보, 난 이 아가씨...이름이 뭐랬지? 아, 은아? 그래...여보, 난 은아가 마음에 들어요. 당신은 어때요?"
새어머니는 아버지의 팔을 잡고 매달리다시피 애교스럽게 물었다.
새어머니의 애교에도 아랑곳없이 그의 아버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둘이 결혼을 하겠다고?"
"...예, 아버지."
그가 대답했다.
"음..."
그의 아버지는 깊은 상념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신음소리를 냈다.
"식사준비 다 됐습니다, 사모님."
가정부의 예의바른 목소리가 거실의 어색함을 깨고 들려왔다.
"일단, 식사들을 하지."
그의 아버지가 먼저 일어났다.
다음은 그.
식당쪽으로 걸어가는 두 남자의 뒷모습은 너무나 닮아있었다.
"이봐!"
그의 새어머니가 두 남자를 따라 일어서려는 내 어깨를 세게 잡아 눌렀다.
"어린 아가씨가 대단하네? 어떻게 그런 깜찍한 생각을 다했어?"
조금전 남편앞에서 교태에 가까운 애교를 부리던 그녀가 아니었다.
"내가 이 결혼 반대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녀는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어깨의 통증으로 인상을 쓰자 그녀는 퍼뜩 내 어깨를 풀어주었다.
"아팠니? 호호~ 근데...난 내껄 지키기위해서 더한 일도 한 사람이야. 잘 해. 알겠니?"
그녀는 그제서야 내 어깨를 풀어주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안다. 그녀가 말한 '더한 일'을...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딸을 불행하게 만든 사람이다.
어미가 되어 그보다 더한 일을 하기도 어려우리라.
나는 그녀가 무서웠다.
"가자. 밥 먹으러. 웃어, 얘..."
그녀가 내 팔짱을 끼었다.
난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순간, 보헤미안의 그 여자가 생각났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그러나 이젠 나도 그의 새어머니와 공범이 되어 여자를 벼랑끝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할 말이 없다.
오늘로 나는 임신 12주가 된다.
뱃속의 아이와 나는 모두 건강하다.
보헤미안의 그 여자가 사라진 지 12주가 넘었으니, 그 여자가 내 뱃속의 아이를 만들어 준 장본인이다.
여자는 <뮤즈>정기연주회날 사건 이후로 술만 마셨다.
그가 살기위해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는 중에도 그 여자의 방황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 여자는 보헤미안의 문을 닫아버렸다.
여자는 몇년 전처럼, 다시 그에게서 도망쳐버린 것이다.
"나 좀 쉬었다 가도 되겠니?"
여자를 찾아 헤매던 그가 어느날 저녁, 나의 자취방에 찾아들었다.
나는 재빨리 초라한 밥상과 소주 한 병을 차려냈고, 그는 몇일 굶은사람처럼 열심히 먹었다.
"너도 한 잔 해라."
밥 한공기를 뚝딱 해치운 그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술이 여러잔 돌았을때, 나는 그의 얼굴이 피로로 발갛게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선배, 너무 피곤한가 봐. 그만 마시고 잠 좀 자요."
나는 얼른 이부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여기서 자요. 난 내일까지 레포트 끝내야 하니까 밤 새야할 지도 몰라."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내 포기한 듯 이부자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휴!..."
그는 긴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신새벽.
책상에서 깜박 잠이 들었던 나는 그의 울부짖음에 눈을 떴다.
"안돼! 안돼! 가지마!"
그가 울면서 손을 내저었다.
나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선배..."
그의 손이 불처럼 뜨거웠다.
깜짝 놀라, 이마를 짚어 본 나는 가슴이 쿵하고 내려 앉았다.
그는 불덩어리처럼 뜨거워져 있었다.
이 새벽에...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무작정 차가운 물과 수건을 들고와서 그의 옷을 벗기고 닦기 시작했다.
어릴 적 엄마는 열에 들뜬 나에게 이렇게 해 주었다.
한 시간이나 흘렀을까?
그는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었고, 그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눈물이 흘렀다.
그가 안쓰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여자를 찾아서 데려와 주고싶다.
나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미애야!"
그가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애야!"
그가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나의 입술을 덥쳐왔다.
길고 뜨거운 입맞춤.....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입술은 짜디짠 눈물 맛이었다.
나는 조용히 옷을 벗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누웠다.
나는 이제 그를 받아들이려 한다.
그가 나를 그 여자라 생각해도 좋다.
사랑하는 사람을 한번만이라도 안아볼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
나는 죽어도 좋다...
그와의 그 새벽에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에게서 진주목걸이를 받는 꿈을 꾸었다.
크고 빛나던 그 진주목걸이의 아름다움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하다.
보헤미안의 그 여자는 뱃속의 아이가 12주가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아이와 나를 책임지려했다.
이제 그는 그 여자를 포기하는 듯 보였다.
"잘 먹네? 입덧은 안하나봐?"
그의 새어머니가 특유의 콧소리로 말했다.
"나도 입덧은..."
그녀는 재빨리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와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입덧, 그 입덧은 보헤미안의 그 여자를 임신했을 때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와 그의 아버지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당황한 건 나 뿐이었다.
그의 아버지에게선 여유있는 중년의 매력이 느껴졌다.
세련된 격조마저 느껴지는 중년의 이 남자...
분명 그 옆에 있는 중년의 저 요부와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
과묵하고 매력적인 로맨스그레이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행이다. 잘 먹으니 좋지."
로맨스그레이는 수저를 놓으며 표정없이 말을 이었다.
"그래, 당황스럽기는 하다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더 늦기전에 결혼해야겠지. 음...내일부터 내 사무실로 출근한다는 조건으로 허락하마."
"아버지?"
그건 아니라는 투로 그가 아버지를 불렀다.
"내 말대로 해. 이젠 가정을 꾸려야잖니?"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토를 달지도 않았다.
다음 날부터 그는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건축사사무실로 출근하였고, 뱃속의 아이가 22주가 되던 어느 토요일 우리는 결혼을 하였다.
내 나이 21살, 그의 나이 25살, 대학교 2학년과 3학년이 되던 해 봄, 우리는 학생부부가 되었다.
그 해 가을, 우리는 진주알처럼 예쁜 딸 '가을'이를 낳았다.
그는 '건축학도로서는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일을 배우며, 열심히 공부했다.
마치, 보헤미안의 그 여자는 처음부터 세상에 없었던 일인 듯 그는 딸에게만 몰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