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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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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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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질 수 없는...


BY 가우디 2005-08-23

<뮤즈>의 정기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400장 찍은 입장권이 축제시작과 함께 동이나 버렸다.

공연이 1부, 2부로 나뉘어 있었으므로, 한 공연당 200명 가까이 입장하는 것이 된다.

"이야...이거, 600장 찍어도 될 걸 그랬어."

"입 좀 다물어라, 1000원짜리 입장권 몇장 팔구 재벌된 기분이냐?"

"못될 것도 없잖아요?"

"정신차리고...스피커나 잘 점검해!"

공연날 아침, 체육관에 세운 무대를 점검하며, 수정선배와 진호선배가 기분좋게 토닥거렸다.

"김은아! 리허설 준비해!"

진행을 맡은 선배가 무대 마이크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무대의상이라야 청바지에 흰색블라우스가 전부여서 그다지 신경쓸 것이 없었지만, 나는 거울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몇번이고 매만지며 어정댔다.

언제부턴가...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헤미안'을 다녀온 이후로, 그가 내 눈앞에 없으면 언제나 그랬다.

한없이 땅속으로 꺼지는 듯한 막막함.

손가락 끝도 들어올리기 힘든 이 무력감.

'왜 이러니? 왜 이러니? 정신차려, 김은아!'

아무리 불러봐도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미동도 없다.

 

"어머, 얘 봐. 바짝 얼었잖아?"

거울 속으로 수정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괜찮아. 처음엔 다 그래. 일단, 무대에 서면 덜 떨리니까 너무 걱정마."

수정선배의 부드러운 손길이 내 어깨에 닿았다.

"예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무대로 나갔다.

무대는 리허설 중인 조명으로 어수선했다.

환하게 켜진 객석조명 덕에 내 리허설을 기다리며 앉아있는 선배들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없다.

그가 없다.

그는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다.

"은아, 화이팅!"

객석 가장자리에서 의자를 정리하던 진숙이가 힘차게 주먹을 쥐어보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기타를 고쳐잡고 무대의자에 앉았다.

선배들이 격려의 박수를 보내왔다.

마이크를 당겨 앉은 나는 노래를 시작했다.

"안개비가 하얗게...내...리던 날..."

그가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가 왔다.

"그대 사는 작은 섬으로...나를 이끌던 날부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를 영원히 내 눈 속에 담아두고 싶다...

"그대 내겐...단 하나...우산이 되었지만..."

객석에 자리를 잡은 그가 방금 자신이 들어온 문을 돌아다본다.

여자다.

'보헤미안'의 그 여자다.

그가 손을 들어 자신의 위치를 여자에게 알린다.

"지금 빗속으로 걸어 가는...나는 우산이 없어요..."

여자는 그를 금방 찾아냈다.

그는 여자가 자기 옆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비로소 내게 손을 흔든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렀다.

그를 갖고 싶다.

내 속에 이런 내가 있을 줄은 나 조차 예상 못했던 일이다.

 

1부가 모두 끝났다.

그는 공연내내 무대 뒤에 서서, 객석 맨 앞에 자리잡은 여자와 눈을 맞추며 싸인을 주고 받았다.

'쟤, 잘하지?'

'다음은 나야.'

'잘 들어. 내가 좋아하는 노래야.'

나는 공연내내 그들이 주고받는 싸인에 골똘해 있었다.

"은아 너, 오늘 감정 좋다?"

진호선배가 어깨를 툭치며 칭찬을 한다.

"예..."

나는 힘들게 웃었다.

화장을 고치며, 질투로 일그러진 내 모습이 거울 속에서 나를 본다.

'너...지금 뭐하는거니?...가질 수 없는 건 애당초 바라지도 않았던 너잖아?...가질 수 없는 사람이야...포기 해. 제발...포기 해.'

그러나 공염불이다.

내 마음을 내 맘대로 하기엔 이미 늦은 것 같다.

 

"꺄아악!"

2부 공연이 거의 끝나 갈 무렵, 갑자기 객석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무대 위의 기타소리가 멈추었고, 그가 사색이 되어 무대에서 뛰어내려왔다.

내 차례가 다 끝나고, 진숙이와 객석 맨 뒷쪽에 앉아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객석 앞쪽을 보았다.

그 여자였다.

그리고 중년의 또 한 여자와 그.

잠시 정적...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세 사람의 움직임만이 소리를 낼 뿐이었다.

"짝! 짝! 짝!"

"퍽!"

중년의 여자는 그 여자의 따귀를 여러번 사정없이 때렸다. 그러나 쉴새없이 휘젓던 손이 그에게 잡히자, 다른 손에 들고 있던 핸드백을 여자에게 날렸다. 여자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여자는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그 매를 다 맞고만 있었다.

중년의 여자는 그에게 두 손목이 모두 잡혀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허공에다 발길질을 시작했다.

나는 여자에게 뛰어갔다.

"이거..."

나는 손수건을 내밀며 여자를 부축했다.

"니가 이럴 수 있어? 나쁜 년! 지환이는 니 동생이야, 이 년아!"

중년의 여자는 그래도 분이 안풀리는 지 고함을 질렀다.

순간, 두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리 모녀지간이라도 이렇게 닮은 얼굴이 있을까?

참 아이러니다.

모녀의 닮은 얼굴이 그들 세사람을 더욱 처참하게 만들고 있으니...

'보헤미안'을 갔던 다음 날, 수정선배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듣지 않았어도 두 여자가 모녀라는 것은 알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년여자는 아들의 어머니이기만 한 것처럼 행동했다.

"내 말 똑똑히 들어. 계속 이렇게 우리 지환이 꼬여낼 거면 너 죽고, 나 죽는거야! 알았어? 나쁜 년!"

여자는 핸드백을 주워 들고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체육관을 나갔다.

잠시 술렁거리던 체육관은 선배들의 노래소리와 기타소리로 다시 평정을 되찾아갔다.

 

그 날 이후, 한참동안 그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매일 '보헤미안' 근처를 서성거렸지만, 굳게 닫힌 문만 볼 수 있었다.

그러던 그가 기말고사가 다가오자 학교에 나타났다.

"졸업은 해야지. 취직해서 돈 벌거야."

그가 아이같이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