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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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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우산


BY 가우디 2005-08-12

  안개비가 하얗게...내...리던 밤...

 그대 사는 작은 섬으로...나를...이끌던 날부터...

 그대 내겐 단 하나...우산이 되었지만...

 지금 빗속으로 걸어가는 나는 우산이 없어요...

 

그해 가을, 축제기간중에 <뮤즈>의 정기연주회가 있었다.

나는 1학년중 유일하게 솔로로 무대에 오르게 되었고, '잃어버린 우산'을 선곡했다.

"네 목소리는 뭐랄까...너무..."

그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그 장난끼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너...사랑 같은 거 해 본 적 없지?"

"....."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아 고개만 떨구었다.

"전 괜찮은데요? 맑고 깨끗한 게 은아 매력인데 뭐...군더더기 없는 목소리로 속삭이니까 꿈결같이 들리잖아요?"

처음 그에게 날 인사시켰던 인호선배가 내편을 들었다.

"맞아. 내 생각도 그래.  음색도 좋고 음정도 안정됐고, 딱 한가지, 감정만 좀더 실어준다면 좋겠는데 말야. 은아 너...할 수 있겠지?"

그와 동기인 수정선배가 말했다.

통키타 동아리 <뮤즈>에서는  정기연주회가 결정되면 선배들이 후배 한명한명을 맡아서 훈련시키는 전통이 있다. 이를테면, 기본적으로 선배 1명당 신입생 1명이 배당되는데,  보통은 선배 3~4명 정도가 한팀이 되어 각자가 맡은 후배들을 함께 훈련시키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를 지도하기로 한 선배는 그였고, 인호선배, 수정선배가 그를 도왔다.

마음을 다해 원하면 이뤄진다고 했던가. 

그와 한팀이 되기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지환이형! 이제 그만하고 저녁먹으러 가요."

"그래 배고프다, 지환아. 오늘은 니가 한 턱내라. 은아 혼자 개인지도 받았잖니?"

수정선배의 말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후배 군기 좀 팍팍 잡지 그랬어? 감히 선배가 기다리는데 안와? 짜식들이..."

그가 손가락을 두두둑 꺾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시간이 없대잖아. 아르바이트 한다는데 어쩌냐? 시간 많은 내가 참아야지. 하하!"

수정선배가 사람좋은 웃음을 흘렸다.

함께 웃던 인호선배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형, 저녁먹고 술 한잔? 오케이?"

 

땡그러렁!

문 위에 달린 조그만 종이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여기야."

까페 문을 몸으로 밀어열며 그가 말했다.

까페는 대학로 어느 허름한 뒷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저녁을 먹고난 후, 그가 이끄는대로 꼬불꼬불 따라오며, 인호선배가 '형, 이제 다왔어?'를 두어번 외쳤을 때 겨우 도착한 곳이다.  

'다시 찾아오기도 힘들겠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겉은 허름했지만 까페의 내부는 예상외로 깔끔했다.

<보헤미안>

나무간판이 문 안쪽에 달려있는 것을 보고, 인호선배와 수정선배가 까르르 웃었다.

"재밌는데?"

인호선배가 두눈을 반짝였다.

간판이 출입문 안쪽에 달린 까페.

아는 사람만 찾아오란 뜻인가?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느끼며 까페를 둘러 보았다.

까페는 의자 네 개씩 딸린 테이블 세 개와 출입문 옆으로 카운터로 보이는 책상, 그위에 놓인 오디오가 전부인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테이블과 의자는 모두 흰색 라탄으로 되어있었고, 검붉은 첵크무늬 쿠션과 같은 무늬의 천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벽은 온통 사진과 낙서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의외로 세련된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우리의 시선을 끈 것은 까페 안쪽에 있는 작은 무대였다. 작은의자와 마이크가 놓여 있고, 벽쪽으로 통기타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라이브도 하나봐?"

수정선배가 물었다.

"주인이 노래하는..."

대답을 하다말고 그는 무대옆 작은 쪽문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그의 시선을 따라 문쪽을 봤을 때, 문이 슬그머니 움직였다.

그는 볼까지 발그레해지며 소년같이 수줍게 웃었다.

"누나!"

그가 '누나'라 부른 여자가 그 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그를 향해 활짝 웃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누구?' 하는 입모양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후배..."

그는 들떠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쪽문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맥주 서너명과 팝콘을 쟁반에 받치고 돌아왔다.

우리 앞에 쟁반을 내려놓은 여자는 조용히 카운터 밑에서 음반을 꺼내 턴테이블 위에 올렸다.

베를리오즈의 '운명의 힘'

여자는 볼륨 다이얼을 조심스럽게 돌려 적당한 크기로 놓았다. 

그리고, 우리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향해 슬로우모션처럼 다가왔다.  

165센티 정도의 키에 깡마른 여자는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윗단추를 두어개 풀어헤친 흰색 브라우스와 짚시풍의 치마를 입은 여자가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그의 옆에 앉았다.

알 수 없다. 이 느낌...이 불안함은 또 뭐지?

"바쁘다고 했잖아?"

여자가 입을 열었다.

순간, 그를 제외한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목소리. 마치, 수년간의 묵언수행을 막 끝낸 승려가 처음으로 입을 떼듯 조심스럽고 깊은 소리였다. 약간 쉰 듯한 목소리는 말하지 않아도 여자의 기분을 알 수 있을 듯 하다.

"목소리가 매력적이시네요, 누님."

인호선배가 여자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래요?"

예의 그 목소리.

살짝 웃으며 그에게로 얼굴을 돌린 여자는 다시 물었다. 

"바쁜데 어떻게 왔어?" 

"얘들이 술 한잔 하자고 해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잘왔어."

여자가 테이블위에 놓인 그의 손등을 살짝쳤다.

그 때, 나는 보았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여자의 손을 잡기위해 순간적으로 허공을 휘젓다 실망한 듯 떨어지는 그의 손을...

 

"손님도 없는데...내가...노래 한 곡 할까요?"

그 날, 여자는 팝송 몇 곡을 불렀다. 그러나 내 귀에는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웅웅거리는 슬픈 울림만이 까페에 가득차 있었다.

술이 여러잔 돌았을 때, 수정언니가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목놓아 울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난다.

나도 함께 울었던 것 같다.

여자를 끊임없이 쫓는 그의 뜨거운 시선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무너진 가슴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난생 처음,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꿈이었을까?

여자가 그를 가슴에 안고, 깊은 한숨을 토해낸다.

제발 꿈이길...

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시선을 내가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