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미는?”
혜리네 집에 들어 서자 평소 같으면 제일 먼저 뛰어 나와 호들갑스럽게 은하를 맞을 애완견 미미를 찾았다.
“얘, 미미 미용 갔어.”
“으응…”
“걔가 나 보다 더 고급으로 노는 것 아니?”
혜리는 미미의 품위 유지에 얼마나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지 한참을 얘기해 대더니 별 말 없이 듣고 있는 은하의 안색을 살폈다. 별로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던지 혜리는 다소 걱정스런 얼굴로 은하에게 “무슨 일 있는 거야?” 했다.
“일은… 나 오늘 슬픈 노래 부르게 해줘.”
“왜?”
“묻지 말고.”
“어쩐지 들어 오는데 좀 꼴꼴해 뵈더라니… 너 혹시 그 윤 교수 때문이니? 그 사람이 둘이 사귀자고 해?”
“아니…”
“그럼?”
“… 난 정아 아빠에게 무엇인가 해서. 또 그 사람은 나에게.”
“얘, 놀랬잖아. 그래도 다행이다 얘. 네가 윤 교수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 아니어서. 후후.”
“왜? 내가 윤 교수 그 사람에게 무엇이면 안 돼니?”
혜리가 안됀다는 말 대신 “얘, 슬픈 노래나 메들리로 불러봐라. 살다 보면 기분 쳐질 때 있어.” 하며 벨리니 작곡의 ‘그대의 창에 등불 꺼지고’ 의 전주를 시작했다. 은하가 마음을 가다듬어 서러운 노래를 시작하기 전 혜리는 주의 사항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항상 모음 길게, 소리 늘쿠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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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아네바 샘뻬까도르 메바졸라
모도르메 꼴리 무오르떼 아꼼빠냐 타!
모도르메 꼴리 무오르떼 아꼼빠냐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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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마다 홀로 울던 그는 지금
꿈속에 홀로 고이 단잠 자네
꿈속에 홀로 고이 단잠 자네
“슬프지?”
“더 슬픈 것 없니?”
“그럼 이번엔… 이 은상 작사 채 동선 작곡 ‘그리워’ 다.”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님은 아니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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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세월
부질없이 헤아리지 말자
그대 가슴엔 내 가
내 가슴에는 그대 있어
그것만 지니고 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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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슬픈 것 없니? 혜리야.”
“ ‘보이 께 사뻬떼’, ‘사랑의 괴로움 그대는 아는가’ 불러 볼래? ‘피가로의 결혼’ 에서 백작의 시종 케루비노가 백작부인을 연모하여 부르는 연가인 것 알지? 처음 불러 보는 것이니까 내 노래부터 들어봐.”
보이께사뻬떼 께꼬자에아모르
돈네베데에떼 시오노넬꼬르
도온네베데에떼에 시오로넬꼬르
도온네베데에떼에 시오로오네엘꼬르!
.
.
.
사-랑의 괴롬 그대는- 아-나
불타는 내 마음 어찌하리
사-랑의 불-꽃- 타는 가슴
불-타는 사-랑의 이 불-꽃-을!
.
.
.
W.A. Mozart 곡
소프라노인 혜리의 노래를 감상할 때 마다 역시 그녀는 프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알맞은 감정 콘트롤에 머리를 깨고 풍성히 퍼져 울려 나오는 감동의 소리… 은하는 혜리가 노래할 때 제일 좋았다. 그녀의 피아노 옆에 서서 거의 무아지경이 되어 혜리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특권을 즐겼다.
노래를 마친 그녀는 해독하기 어려운 이태리어 가사를 차례차례 읽어 준 뒤 은하에게 읽어 보게 했고 어느 부분에서 소리를 늘쿼야 하는지 어떤 컨셉으로 불러야 하는지 등의 설명을 덧붙였다. 여자가 남장을 하고 슬프게 부르는 곡이라는 것도.
은하는 신곡(?) ‘사랑의 괴로움 그대는 아는가?’ 를 연습한 뒤 고요하고 섬세한 곡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더 부르고 나서 혜리가 척 알아서 들려 주는 피아노에 따라 ‘기차는 8시에 떠나네’ 3절 까지 불러 보았다. 음미하듯…
태식이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버클리 유니버시티 애브뉴 상의 자동차 안에서 이 곡을 부르고 있었다고 했다. 운전석 창문을 반 쯤이나 열어 놓고… 빨간 신호등 앞에서… 그땐 4월 이었다…
윤 태식… 정 은하
그와 그녀와의 고운 비밀을 간직하듯
은하는 노래 불렀다.
카테리니행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가네
십일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남긴 채 앉아만 있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마음이 좀 풀리니? 정 은하?”
“응, 노 혜리. 시원해 나.”
노래를 부르고 난 후의 높아진 음성으로 은하가 웃으며 상쾌하게 대답했다.
“다행이다. 생과부 가슴이 뚫린다니. 호호. 그런데 너 노래 끝낼 때 입 안으로 휘파람 불 듯 당기면서 마쳐야 하는 것 더 연습해. 알았지?”
“응, 알았어. 흐흐”
은하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혜리를 보며 눈웃음을 쳤다.
“너 그렇게 금방 웃고 그럴 때는 은근히 정들라 그래. 그거 아니?”
“정들면 누가 겁 난데? 확 좋아하면 되지.”
하하하…
둘이서 마주 보며 웃다 혜리가 방금 생각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이 참! 하며 손바닥을 마주 잡았다.
“얘, 얘, 너 내일 모레 김 교수 와이프 오는 것 알고 있었니?”
“… 아니 금시초문이야.”
“세희가 그러는데 여기 와서 2주 있다 간다더라.”
은하는 응, 그래? 하는 정도로 관심 밖의 일 처럼 대꾸 했지만 혜리는 무슨 짐작을 했는지 은하 보다 한 수 위에 있는 것 같은 태도로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너 그 사람에게 관심 있다면 그냥 바라만 봐. 만나고 함께 다니고 하지말고. 자꾸 만나면 정드는 것 알지? ”
혜리는 내 말이 맞지? 하는 표정으로 잠시 은하의 표정을 살피다 은하가 별 말 없이 서 있자 다시 말을 이었다.
“환상 갖지마. 사람 다 거기서 거기야. 장점만 있고 단점만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니? 너 알지? 김 교수도 너도 가꾸어 나가야 할 가정이 있다는 것. 너 자칫하다 남의 꽃밭 망가뜨리고 네 꽃밭도 망칠래? 너 그거 순식간이다.”
“누가 그렇대? 얘는? 나도 알아…”
“그럼 윤 교수가 너에게 가까이 오는 것도 막아내, 일지감치. 자꾸 만나고 얽히면 두 사람 나올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든다. 치러야 할 대가가 커지기 전에. ”
혜리는 미리 겁을 주는 것 인지 아니면 그렇다고 가정을 하는 것인지 은하에게 타이르듯 달래는 어조였다.
“너 정아 데리고 서울 정아 아빠에게 잠깐이라도 다녀 오지 그러니?”
“… 그래 볼까?”
“그래, physically(육체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도 도움이 될 거야. Out of sight, out of mind.(안 보면 잊혀진다.) 오랜만에 정아 아빠 옆에 있으면 좋잖아.”
혜리는 가끔씩 대화 중에 영어를 섞어 쓰곤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미국에 10여년이 넘도록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섞여 나오는 정도로 어색하지 않고 듣기 좋을 때가 많았다.
“너 그 선글라스 찾았니?”
“응, 내가 전화했어. 달라고.”
혜리는 다행이 더 이상 자세히 묻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어디서 받았느냐고.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냐고. 태식을 다정한 친구사이로만 여겼다면 그를 만나 소풍도 가고 음악회에도 갔었다는 말을 혜리에게 할 수 있었을텐데. 그는 친구가 아니라 한 남자로 은하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너 점심 먹고 갈래? 준이 아빠 점심때 온다고 해서 육개장 좀 끓여 놓았거든. 먹고 가라. 혼자 있는데.”
“어머 얜, 너만 있으면 몰라도… 싫어.”
“우리가 뭐 신혼이니? 부담 갖게. 요즘 방학이라 레슨도 없어.”
“됐네요. 노 혜리.”
은하가 “나 갈게.” 하며 뮤직 스텐드 위의 명가곡집을 집어 들고 주섬주섬 주변을 챙기고 있을 때 집 앞 드라이브 웨이에 차 서는 소리가 난 후 곧 벨 소리에 혜리 신랑이 나타나자 이 층 제 방에 있던 아이들 셋이 우르르 몰려 내려 오는 소리가 났다.
“어머, 안녕하세요?”
“어이 안녕하세요? 제가 너무 빨리 왔나요?”
헌칠한 키에 말쑥한 비즈니스맨 타입의 혜리 신랑은 아니예요 다 끝나서 가려던 참이었어요 하는 은하에게 “점심 드시고 놀다 가시죠.” 하며 집에 빨리 온 것을 오히려 미안해 하고 있었다.
“혜리야, 나 간다. 그럼 저 갈께요.”
혜리와 혜리 신랑을 번갈아 보며 목례 정도의 인사를 나눈 후 문을 나서려 할 때 “안녕히 가세요 인사드려야지.” 하는 혜리의 말에 따라 아이들이 쑥스러운 듯 기어들어가는 한국말로 “안녕히 가세요.” 할 때 “그래 안녕.” 은하는 혜리의 세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보았다.
정훈은 일 욕심에 권력에 대한 욕구는 누구 보다 많았어도 아이에 대한 욕심은 그리 대단치 않아 정아 하나로 만족하고 지냈다. 은하도 마찬가지 였고. 지나가는 말로 지금 하나 더 가져 볼까 가끔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었지만 이젠 아이를 갖기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정아도 캠프에서 올 때가 되었는데…
은하는 혜리의 집을 나서자 어디로 갈까 하다 근처의 쇼핑몰로 차를 몰았다. 점심도 간단히 먹고 갈 겸 지금처럼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모르는 시간이 생길 땐 안성맞춤인 곳이었기에. 날은 어찌나 메마르고 더운지 차 창 밖으로 보이는 주위의 먼 산등성이들이 누렇게 소잔등 처럼 변해 있었다.
파킹 스트럭쳐 1층에 차를 주차한 뒤 은하는 노천 스타일로 된 숍들을 차례차례 밖에서 훑고 지나갔다. 윈도우에 비친 숍의 디스플레이를 보다가 눈에 들어 오는 것이 있으면 숍 안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만져 보기도 했다. 이곳은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지 한국으로 치면 벌써 한 물 지나간 디자인의 의상들이 쇼윈도에 버젓이 걸려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었다. .
봉제 완구를 파는 작은 숍에 들어가 은하는 비니 베이비라 불리는 작은 봉제 강아지 인형을 하나 샀다.
“정아가 와서 보면 좋아할거야, 후후.”
서울에서 기르던 시추 강아지를 남에게 주고 미국에 올 때 얼마나 서운해 하던 정아였는지 모른다. 정아 뿐 아니라 은하도 한동안은 길에 지나가는 개만 봐도 그 시추 생각이 나곤 했었다. 은하는 봉제완구 숍을 나와 노드스트롬 백화점으로 향하면서도 팔에 끼고 있던 토드백을 열어 봉투 안의 작은 갈색 강아지 인형을 한 번 보았다. 정아가 책상 위에 얹어 놓고 흐뭇해 할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간단한 점심을 먹어야겠어.”
어디로 가야 할까 잠시 둘러 보고 있는 은하에게 태식과 함께 들렀었던 P.F.Chang’s 레스토랑이 보였다. 비가 온 날 오전에 연습장에서 만났던 태식이 은하의 흰 장갑을 주워 건냈었다. “저, 이거… 그쪽 거 아니예요?” 하며. 흰 골프 장갑이 먼저 보이고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은하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었다. 볼 연습 후 둘은 이곳에서 함께 점심을 했었고.
“윤 교수가 너에게 가까이 오는 것도 막아내, 일찌감치. 자꾸 만나고 얽히면 두 사람 나올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든다. 치러야 할 대가가 커지기 전에. ”
조금 전 혜리가 한 말도 뇌리에서 맴돌고 있을 때 검은 토드백 속의 핸드폰 벨이 울리고 있었다.
510-335-5099
그의 핸드폰 번호…. 레스토랑에 오면서 삼삼오오 영구 라고 외웠던.
망설여졌다. 그의 전화를 받아야 하는지…
다운로드 받아 입력한 신곡이 멈출 때 까지 은하는 주저하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내 노래를 끝낸 전화기는 잠잠하더니 새로운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느라 삑삑 소리를 내주었다.
“윤 태식입니다.
만나고 싶어요.
7시에 버클리 마리나로 나오시죠.
피어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메시지를 남긴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자 은하의 마음이 다시 허물어지고 있었다.
난 왜 자꾸만 그 쪽에게 다가 가고 싶은 거죠?
“너 내일 모레 김 교수 와이프 오는 것 알고 있었니?”
혜리의 음성이 귓전에 다시 살아나고 있었고…
“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점심도 잊고 노드스트롬 백화점 안을 건성으로 왔다갔다 하던 은하는 2층 레이디즈 룸 한 켠에 마련된 소파에 눌러 앉았다. 잠시 턱을 괴고 있던 그녀는 입력된 전화번호를 찾아 너무나도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김 정훈 1-82-2-545-9758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
.
.
‘메모를 남겨주세요. 삐---’
신호가 여러 번 가도록 정훈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서울은 아직 너무 이른 아침이라 자고 있는것일까 아니면 새벽 운동을 나간 것일까.
은하는 정훈의 핸드폰 번호 입력을 찾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후 들리는 메시지는 더욱 은하를 힘들게 만들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맥없이 전화기를 접은 은하는 정훈이 독일 출장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을 했다. 일전에 독일로 떠나기 전 인천 공항에서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약 이 주쯤 그곳에 머물 것 이라고 했었는데.
“이런 때 정훈이 있어 준다면, 그에게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나를 잡아 달라고, 나를 꼭 잡고 놓아 주지 말아 달라고 애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너 없이 못살아. 널 사랑해.”
이렇게 말해 준다면…
은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가다 가끔씩 힘이 들어서 정훈을 찾을 때 마다 그는 은하를 배려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은하는 혼자서 극복해내야 하는 법을 일지감치 깨닳았었다. 경제적인 문제만 해도 그랬다. 한 쪽이 어느 한 편을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어떤 의미에서든지 서로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 결혼 생활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정훈과 결혼한 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었다. 그것이 사랑이든 마음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결혼 전 은하가 꿈꾸어 오던 사랑… 아버지 같이 의지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 일방적인 사랑을 받으며 그의 귀여운 연인이 되는…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정훈과 결혼하고 나서 얼마 후 소녀 때부터 오랫동안 간직했던 이런 환상을 어느날 모조리 깨버리기로 했을 때 그녀는 너무나 서글픈 생각에 한동안 방황했던 기억이 있다. 나 혼자 라는 생각에… 나 혼자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마음에…
그 뒤로 은하는 대학원을 다녔고 어린 정아를 놀이방에 맡기면서 까지 직업을 가졌다. 힘들 때 마다 그녀는 뒤를 돌아다 보았다. 철없이 정훈을 의지하려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결혼 후 얼마 뒤 동부 보스톤으로 유학 오게된 정훈을 따라 왔을 때 둘은 차 안에서 티격태격하던 기억이 있다. 슈퍼를 본 그로서리 봉투를 누가 들고 집안으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정훈의 주장은 내가 반 , 네가 반 나누어 들어 날라야 공평하다고 했고 은하는 내가 장 본 것을 냉장고에 넣고 밥을 하니까 대부분은 정훈이 들어야 한다는.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엔 그 일로 남자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었다. “후후, 지금 같으면 내가 다 들어 날랐을텐데… 운동도 할 겸.”
이미 다 깨어버렸다고 믿고 있던 남자에 대한 환상—아무 조건 없이 나를 일방적으로 사랑해 줄 것 같은, 따뜻하게 기대보고 싶은—그런 오래 전의 환상을 태식은 다시 불러 일으켰다.
그를 만나면 나를 내려 놓아도 괜찮을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의 옆에 서 잠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흔들리는 나를 잡아 줄 것 같은 남자였다. 그렇게 다가오는 은하를 사랑해 줄 것 같은 그였다. 변함없이.
토드백 안의 핸드폰 벨이 다시 울렸다.
다시 뜨는 그의 핸드폰 번호
510-335-5099
순간 은하는 전화를 받으려 핸드폰을 열어 귀에 대고 있다 도로 닫아 버렸다.
태식, 그 쪽은 누구예요? 왜 나를 힘들게 하는거죠? 나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거죠?
은하는 핸드폰의 파워를 껐다.
한동안 레이디즈 룸 소파에 몸을 묻고 있다 아파트로 돌아온 은하는 정아 방 침대 위 머리맡에 비니베이비 강아지를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짧은 반 바지로 옷을 갈아 입은 후카펫을 베큠(진공 청소기를 사용한 청소) 한 후 양동이에 락스를 풀어 화장실이며 주방 곳곳 청소를 시작했다. 고무 장갑을 끼고 한 동안 청소를 하던 그녀는 옷 서랍장 정리도 마저 마쳤다. 가끔씩 눈은 장미 넝쿨이 그려진 벽시계로 가긴 했지만.
벽시계 바늘이 5시를 가리키고 있을 때 그녀는 아파트 안의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키 큰 야자수 몇 그루가 즐겁게 풍덩거리는 아이들을 지키고 있는 수영장 앞의 피트니스룸에서 러닌 머신 위에 올라 가 걷기와 뛰기를 반복한 후 근육 강화 기계운동을 했다. 빈 운동실의 대형 프로젝션 TV에서는 요리 채널이 한창이었다. 이태리의 파스타 요리를 선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
둘
하나
둘
.
.
.
땀이 흐르고 있었다. 몸과 마음 안의 노폐물이 다 빠져 나가는것 처럼.
마치 그녀의 마음 안에서 자꾸만 고개를 드는 태식을 향한 미련을 지워 버리기 위함인 지 그녀는 쉬지 않았다.
땀에 젖어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그래도 그녀의 눈길은 장미 넝쿨 벽시계로 먼저 가고 있었다.
6시 40분
사십분이 넘도록 버클리 마리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태식을 생각하니 이제 부터는 안 나갈 것이라고 말이나 해 줄걸 하는 후회가 되어왔다. 그가 그냥 돌아갈 수 있게. 은하는 망설이다 꺼 놓았던 핸드폰을 백에서 찾아 꺼내 열어 다시 켠 후 태식의 번호를 눌렀다.
1-510-335-5099
그런데 그 순간 왜 다시 은하의 가슴이 뛰어 오는지…
은하는 심호흡을 한 번 후 하고 들이 마셨다 뱉었다. 그리고는 마음 속으로 연습했다.
“이제 그만 만나요. 그게 좋겠어요 우리…”
따르릉
첫 신호음 이후 연결된 전화기를 타고 들려올 것으로 예상했던 그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
“… 저 은하예요…”
“…”
“저… 우리 이제 그만 만”
“여기서 기다릴께요.”
은하의 그만 만나자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겠다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은하는 그 무엇에 끌림을 당하듯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내리고 있었다. 촟점을 잃은 눈동자를 허공에 고정한채. 숨이 제대로쉬어지지 않도록 뛰던 가슴은 막혀 오고 있었고…
그 자리에 핸드폰을 떨어뜨린 그녀는 뛰다시피 욕실로 가 샤워 부스의 샤워 꼭지를 틀어 놓고 훌훌 땀에 젖어있던 운동복을 벗어 제쳤다. 미지근한 물 아래서 재빠르게 몸을 닦아낸 그녀는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 검은 고무줄로 돌려 묶고 간단한 화장을 했다. 마 음이 급해서 그런지 입술이 잘 그려지지 않아 지우고 다시 그려냈다. 그리고는 클로젯 안에 걸려 있던 앞 단추가 달린 햅번 디자인의 화사한 베이지 꽃무늬 민소매 원피스를 재빠르게 걸쳐 입었다. 거울을 볼 새도 없이 거실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검은색 토드백을 나꿔채듯 들고 가느다란 뒷굽이 여성스러운 앞이 막힌 검은 샌달을 갖춰 신고 아파트를 나선 그녀는 마음이 급했다.
태식이 버클리 마리나에서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하면.
지금 까지도 러시아워인지 프리웨이는 그 날 따라 곳곳에서 늦장을 부리고 있었다. 자동차 안의 시계를 보았다.
8시 15분
“아직도 마리나 까지 가려면 삼 사십 분은 더 걸릴텐데…”
초조한 마음에 이리저리 차선을 바꾸어 보았지만 별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전화를 해볼까? 지금 가고 있다고.”
그러나 급히 나오는 바람에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로 가는 시간이 이토록 길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얼른 가고 싶어.”
죽—늘어 선 키 큰 가로등 위에 매달아 놓은 색색의 깃발들이 바다 바람에 펄럭이고 있는 마리나 입구를 지나 태식이 기다리고 있는 피어 까지 차를 몰고 갔을 때 그는 뒷 모습을 보이며 바다 쪽을 보고 서 있었다. 양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채…
파킹 할 정신도 없이 피어 앞길에 어코드를 세운 그녀는 뛰어 내리며 그에게로 갔다. 그의 등 뒤에 잠깐 서 있던 그녀는 철썩대는 방파제의 물소리 때문인지 그 때 까지도 등을 보이고 서 있는 그의 허리를 살며시 두 팔로 감싸 안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얇은 원피스를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그의 등은 단단한 느낌이 났다.
“누구게?”
은하가 행복한 듯 속삭이며 그의 등 뒤에서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음… 누구시죠?”
“…알아 맞춰 봐라.”
“음… 청개구리 반찬!”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를 한 것도 아닌데 그는 ‘개구리 반찬’ 이라고 했다. 그 발상이 너무 우스워 은하가 깔깔깔 웃어댔다. 말해 놓은 그도 웃고 있었다. 아마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서 그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하하 청개구리는 말도 안된다.”
“그럼… 또 한 송이의 백합!”
그의 등 뒤에서 그를 껴안은 채 웃고 있던 은하의 말이 갑자기 없어졌다. 잠시 후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나 이렇게 조금만 있어도 되는거죠?”
잠시 미동도 없던 은하가 그의 등 뒤에서 갑자기 흐느끼는 목소리를 냈다.
“…”
은하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물 방울이 태식의 연회색 빛 니트 셔츠를 적셔 얼룩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나 그냥 산뜻하게 그 쪽을 만나고 싶은데 왜 집착하고 있는지 몰라. 이런 내가 싫어.”
은하가 약간의 코 메인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나 그 쪽에게 부담 되고 싶지 않아. 나 때문에 힘들어 하거나 망설이지 말아요. 나 바라는 것 없어.”
태식이 은하의 팔을 가만히 풀고 돌아서서 말없이 그녀를 가슴에 안았다. 은하가 그토록 작은 새처럼 느껴진 적은 여태 없었다.
“나 정말 나쁜 놈인가 봐. 왜 은하를 괴롭히는지… 그런데 내 맘대로 안돼. 그 쪽을만난 이후로…”
“날 데려가 줘요. 잠시라도 좋아. 날 당신 여자로 만들어줘!”
땅거미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진 잿빛 황혼 속에서 은하가 말했다 . 아니 그것은 애원에 가까운 것이었다. 은하를 안은 태식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의 품 안에서 은하는 혼잣말 하듯 살며시 말했다. 임박한 어두움에 하나 둘씩 바다 건너 불빛이 살아나고 있을 때에.
그렇게 잠시 태식에게 안겨 있던 은하가 더욱 조여 오는 태식의 포옹에 큰 소리로 아-- 숨막혀 하는 바람에 두 사람이 함께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된 다던데…”
태식이 은하를 안았던 팔을 풀며 그녀를 놀렸다. 웃다 눈물 자국도 닦다 콧물도 훔치던 은하를 보고 있다 그는 “가시죠.” 하며 은하의 손을 잡고 은하가 세워 놓은 차 쪽으로 나란히 걸어갔다.
“배고프죠? 저녁 먹고 들어 갈까요?”
“나 점심부터 여태 굶은 거 아세요? 후후 배고파 죽겠어요.”
“그럼 저 차부터 주차장에 세웁시다.”
“네. 그래요. ㅎㅎㅎ”
한 낮의 열기가 식어 가는 버클리 마리나의 충만하게 들어 찬 밤 바닷물이 두 사람의 뒤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