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2월x일. 심리과,치과 진료
오전에 나는 심리과로 불려갔다.심리과 여선생님은 마흔이 조금 넘어 보이는 화려한 쌍거풀 눈과 서그서글한 웃음이 인상적이었다.첫 테스트는 그림을 진열해 놓은 뒤 어떤 생각이 드느냐는 시험이었고, 나중 테스트는 어휘력 테스트였다.
- 어자영씨,입원 하자마자 심리 테스트한 결과가 오늘에서야 나와서 자영씨를 부른거랍니다.기억나시나요?심리 테스트한 사실을.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입원하고 처음 며칠 동안은 내가 왜 여기에 와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가슴속에 분노가 많더군요.일종의 억압된 감정이죠.국문과 출신이던데 한번 글을 써보세요.가슴속에 분노가 있다는 것은 정열이 있다는 증거죠. 자영씨 처럼 일시적으로 꿈을 꺾은 사람이 한번 일어서면 무서운 열정으로 꿈을 키우게 되죠. 그게 자영씨 완치에 도움이 돼요.춘천에 정신분열자 작가가 있는데 남들이 그려내지 못하는 정신세게를 독특한 필치로 섬세하게 구사해 내죠.바라만 보고 쓰지 않는것은 안돼죠?
과연 이 나이에 대학교때 쓰고 꿈을 접은 소설을 다시 쓸 수 있을까? 에술의 신이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쓸 수도 있겠다고 혼자 생각해 보았다.
오후에는 C와 함께 치과에 갔다.치과 선생님은 자그만한 체구에 선한 인상을 가진 남자의사였는데 언제나 1300여명 가량의 입원환자중 갑작스런 치통 때문에 오는 환자들이 워낙 많아서 종종걸음을 치는것을 진료하러 올 때 마다 보아선지 감사한 마음이 들곤 했다.
원래 급한 치통 치료만 하게 되어 있는데우리 둘이 해달라고 때를 쓰니까 그는 나와 C의 보철 치료까지 해 주겠다고 했다.내일 나는 퇴원한다고 했더니 통원 치료시 치과에 들르면 된다고 말씀해 주셨다.C는 부분 틀니를 해야 했다.
-언니야, 나 약을 꾸준히 먹고 있는데 기분이 왜 이렇게 우울하지?그래도 언니야 조울증이 우울증 보다는 낫다고 선생님이 말씀 하시더라. 우울증은 자살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대.
-부분 틀니 때문에 속상해서 일시적으로 우울한거야.여기 환자들 퇴원할 때 봐. 대부분 퇴원하면 뭘 할까 생각 하느라고 말이 없어지고 우울한 얼굴 표정을 짓잖아.
병실에 돌아와 보니 A가 어제 퇴원했는데 그 자리에 F환자가 와 있었다.A는 며칠전에 외박을 하고 들어 와서는 남편과 함께 곧 퇴원 수속을 밟았다. 공장에 취직을 하게 되어 빨리 퇴원해야 한다고 했다.F아줌마는 춘천 국립 정신 병동 지부에서 온 50대 아주머니였다.K대학 의상학과 출신의 인테리였다.9시에 불을 끄고 나서 어둠 속에서 아주머니는 마치 연극의 모노로그형식 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독백 처럼 들려 주었다.대학원 출신의 아저씨는 천하의 난봉꾼이고 남매는 모두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했다.아줌마는 벌써 5년째 집에 들어 가지도 못하고 서울에서 만기가 되면 춘천지부로 , 춘천에서 만기가 되면 다시 이 병원으로 오는 식의 다람쥐 체바퀴 돌듯이 입원 생활을 반복 하고 있노라고 했다.F아주머니의 친정 여동생이 보호자로 이병동에 기록 되어 있다고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언니 보기 싫어서 매일 미친년,미친년 몰아 세우는 사람이 남편이야.자기 바람 피우려고 언니를 평생 병원에서 빼 주지도 않은 악마야.언제 그 사탄이 면회 한 번 온 적이 있어.
-정신 멀쩡한 사람이 병원에 있으려니까 나도 참 힘들었어. 그래도 집보다 여기가 더 편해. 신랑이 아파트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여기 미친년 데려 가세요'하면 정말 내가 미친년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야.오히려 여기 있으면 얼굴살도 뽀얗게 오르고 하는데 집에 가면 얼굴이 까칠해져.남편 등쌀에 견딜 수가 없어.
F아줌마는 입원하는 날부터 주방장일을 거들기 시작했는데 설거지는 물론 약 먹을 때 환자들 컵에 물 따라 주는 일등을 도맡아 했다.아마도 일에 미쳐서 자신의 처지를 잊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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