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9.xx일.병동 밖은 화창한 가을. 병원소개
입원한지 1주일 되는 날이다. 나는 지금 내집을 떠나서 여기에 왜 있는가?무엇이 나를 삼남매를 둔 가정살림을 팽개치고 이 곳으로 오게끔 했는가?
정신병동은 패쇄병동이 많지만 이 곳은 개방병동,낮변동이 있는 항국 최초의 정신병원이며,13개 병동 1300명 가량의 환자가 수시로 입원하고 퇴원하는 곳이다.
내 병명은 우울증(내 진료일지에는 영어로 DEPRESS라고 적혀 있슴).
1주일 전 남편은 말했다.
-너를 위해 입원 하는거야. 살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영아랑 나랑 얼마든지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으니까.
1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나는 그에게 애걸했다. 이미 병원 부장 친구에게 연락을 마쳤다고 그는 차갑게 대꾸했다.
큰딸 영아와 함께 입원하기 위해 탄 택시 안에서 나는 하염없이 울었드랬다. 신을 원망했다. 정녕 입원이 마지막 카드였을까? 우울증은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고 살래야 살 수도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갱년기 우울증에다 가정환경까지 겹쳐서 나는 황폐한 마음으로 55병동에 들어섰다.
우울의 감정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좋을까? 보봐리 부인을 쓴 프랑스의 문호 프로벨은 모든 사물에는 일물일어(一物一語)만 있다고 주장했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중국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배수진(背水進)이란 단어가 가장 적합하다고 할까.공포 그 자체다.
어느날,나는 정현종 시인의 (견딜 수 없네)라는 시를 발견했는데 그 시가 나의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다.
견딜 수 없네-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