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서너시가 되었을 쯤 수빈은 원영을 보냈다.
원영은 바로 가게앞에서 택시를 탔다.
[살짝만 건드려도 깨질것만 같은 분위기의 아가씨네?]
마치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은영은 말했다.
[아니, 정말 이형사 동생 맞아? 스물 아홉이라며? 믿겨져? 열아홉이래도 믿겠네.
너무 조심스럽고 너무 조용하고....좀 부담이네?]
[오래전...사고가 있었다나봐요. 그래서 사람들 만나는 걸 두려워하고...뭐 그렇대요.
지금 저 모습도 많이 나아진 모습이라고....원우씨는 아마도 제가 힘이 되어 주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했나봐요]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건 저도 몰라요. 굳이 묻지 않았어요. 어쨌거나 언니가 많이 도와주세요]
[내가 어떻게?]
[언닌, 사람들을 편케 해 주잖아요]
[어머, 그런가?]
은영 언니는 기분이 좋은듯 웃었다.
[오늘 바쁜일 없어요? 새로 나온 영화 CD 들어온 거 있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볼래요?]
[나야 좋지. 제목이 뭐야? 난 적당히 야한게 좋더라. 알지?]
이번엔 수빈이 웃었다.
[근데 이형사 동생, 내일 나올까? 우리 내기할래?]
수빈이 또 웃었다.
저녁무렵
원우가 전화를 했다.
-오늘 저녁 시간, 어떻소?-
[미안해요. 오늘은 가볼곳이 있어서 안돼요]
-어딜 말이오?-
[...미안해요. 하여간 오늘은 안되겠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좋소. 더 묻지는 않겠소. 솔직히 오늘 당신을 만나면 숨도 못쉴 정도로 꽉. 안아 줄려고 생각했었소-
[예?]
-내 동생이 전화했었소. 기분 좋은 목소리로...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였소. 당신이 아주 맘에 든다고 합디다. 그곳 분위기도 그렇고...
내일 또 가도 되는지 나보고 대신 물어봐 달라고 했소-
[그럼요. 원영씨가 원하는 한 언제든지 와도 좋다고 하세요]
-...고맙소-
[아뇨...머...]
-다음에 만나면 내 그 보답은 톡톡히 하리다.
어디를 가는지는 몰라도 너무 늦게까지는 있지 말고. 알았소?-
[꼭 10대 딸네미를 걱정하는 아버지같은 태도군요]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오늘 당신을 못본다니 좀 아쉽지만...이제 끊겠소.
그거 알아요? 하루라도 당신을 못보면 몸이 근질근질하다는 거...내일 전화하리다-
그녀의 심장을 벌렁거리게 해놓고 그가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심장에 올려 놓으며 가만히 미소지었다.
행복이라는 아지랭이가 몸속 깊은곳에서 슬며시 번져 나오는 것 같았다.
밤 11시.
수빈은 익숙한 거리, 익숙한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하지만 내리지는 않았다.
넓은 주차장...우아하게 심어져 있는 나무들...화단...분수대...
익숙하면서도 이제는 낯설기 그지없는 곳이다.
그래도...그래도 아직은...수빈에게는 향수가 묻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차에 기댄채로 위를 올려다 보았다.
1층...
2층...
3...4...5...6...7...8...9...110...11...
12층...!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베란다 창밖, 난간을 칭칭 감고 피어있던 장미들...
그녀 어머니의 자랑거리였고 동네 사람들 모두 부러워했는데...
새어머니란 여자가 죄다 뽑아서 버렸다.
수빈의 눈가가 젖었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흠칫했다.
그녀의 아버지 같았다.
밤이고...먼 거리였으나 두 부녀는 금세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수빈은 재빨리 차를 타고 그곳을 빠져나와 버렸다.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온 수빈은 불도 켜지 않았다.
생맥주를 꺼내 안주도 없이 물을 마시듯 들이켰다.
캔 하나가 둘이 되고...
전화가 울렸으나 그녀는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나의 엄마는 불행하고 비참하게 세상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