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엄마와 나 그리고 내 딸 왼쪽 엉덩이에는 몽고반점이 있다.
진통은 아주 서서히 왔다. 그러더니 점차 심해져 5분 간격으로 온 몸이 오징어처럼 꼬이기 시작했다. 자궁이 벌어질 때마다 온 몸의 뼈마디가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이었고 바늘처럼 내 몸 구석구석을 찔러댔다. 허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고 진통이 멈추지 않으면 다시는 남편 얼굴을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나는 남편의 팔목을 있는 힘껏 부여잡고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애원했다. 남편은 내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나의 진통을 함께 겪고 있었다. 어느새 남편의 왼쪽 팔에는 파란 멍이 들고 옷도 늘어져있었다. 남편 전화를 받고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려온 친정엄마는 진통을 겪고 있는 딸을 안타까운 눈으로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엄마! 살려줘! 참을 수가 없어. 제발... 살려줘!”
남편이 곁에 있는데도 나는 계속해서 엄마만 부르고 있었다. 마치 갓난아이처럼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산부인과가 떠나갈 듯 소리를 질러댔다.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나는 잠깐 잠깐 꿈을 꾸었다. 폭풍이 몰아치는 드넓은 바다 한 가운데 나 혼자서 손발을 허우적거리고 있고, 파도는 금방이라도 나를 삼켜버릴 것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결국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속으로 끌려 들어간 나는 그대로 잠이 든다. 그때 어디선가 남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면 안돼...정신차려...지선아!”
남편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창 밖의 어둠은 어느새 푸른빛으로 물들어있었고 나를 지켜보고 있던 남편과 친정엄마는 매우 지쳐 보였다. 나의 뿌연 시야 속으로 들어 온 시계 바늘은 유난히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도 너를 이렇게 낳았어...그렇게 엄마가 되는 거란다..”
몰랐다. 엄마가 나를 이렇게 배 아파서 낳았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저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이 싫어서 엄마를 원망하고 살았던 나였다. 오씨 집안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결혼한 나였다.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엄마 가슴에 못 박으며 살았던 나였다.
“아...아...살려줘. 엄마!!”
“간호사님 우리 딸 좀 봐 주세요.”
나는 계속되는 진통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친정엄마는 간호사를 불렀다. 뒤늦게 나타난 간호사는 내진을 마친 뒤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다며 자꾸 소리 지르면 뱃속의 아기가 스트레스를 받아 태면을 먹고 나올지도 모른다고 겁을 주며 나갔다.
“너도 힘들지만 좁은 자궁 문을 열고 나올 네 자식은 얼마나 더 고통스럽겠니.”
엄마는 아기가 나보다 열 배 스무 배는 더 힘들 거라고 말했다. 이렇게 진통을 겪고 배 아파서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한다. 눈물만 나왔다. 소리도 지를 수 없다니 고통은 두 배가되었다. 하지만 진통이 시작 될 때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변은 몸밖으로 빠져 나왔고, 온 몸은 풍선처럼 부풀러 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몇 번의 내진 끝에 드디어 간호사는 아기 머리가 보인다고 했다. 흥건하게 젖은 가랑이 사이로 뻘건 피와 아기가 쑥 빠져나갔다. 정말 시원했다. 앓던 이를 빼는 기분이었다. 오랜 변비 끝에 숙변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순간 온 세상이 정전이 되는 기분이었다. 하늘이 노랗게 변해야 아기가 나온다던 말이,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아프다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축하합니다. 예쁜 공주님 입니다.”
어디선가 간호사의 말이 들려왔다. 간호사는 핏기도 가시지 않는 딸아이를 내 가슴에 올려 주었다. 따뜻했다. 너무도 따뜻해서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수고했어. 자기야. 봐봐. 우리 딸이야. 우리 딸이라고...”
아기를 낳는 그 순간까지 내 곁에 있었던 남편은 땀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에 뽀뽀를 해 주었다. 자신이 탯줄을 잘랐다고 했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고 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영화 상영관에 불이 들어오는 것처럼 온 세상이 잠시 정전이 되었다가 환하게 다시 불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가슴 위에 올려진 딸아이는 본능적으로 눈을 뜨더니 잠시 엄마의 얼굴을 확인 한 다음 다시 눈을 감았다. 마치 열 달 동안 어두운 자궁 속에서 엄마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었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나는 딸아이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손가락과 발가락은 모두 정상인지 궁금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힘들었지만 딸아이도 무척 지친 모습이었다. 순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드디어 내가 엄마가 됐다. 그토록 원망했던 엄마 말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엄마에게 왜 나를 낳았느냐고 가슴에 못 박는 소리를 잘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이 너무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가난이 뭔지 모르고도 잘 사는데 나는 어린 나이에 너무 빨리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가난하다면 가난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수가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것은 불편하고 창피한 것이었다. 가난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하는 가난한 집의 어린아이들은 열등감으로 부끄러움으로 가슴에 상처를 내며 살아간다. 선택할 수만 있었다면 부잣집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을 만큼 가난은 어린아이에게 큰 고통이면 불편함이었다.
내 나이 일곱 살 때 가출을 한 적이 있었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와 아빠는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왔고 어린아이 혼자 하루종일 집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어딘가에 내 진짜 엄마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다. 결국 나는 집을 나갔다. 걷고 또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하늘을 보았을 땐 남산타워가 보였다. 지금의 63빌딩. 하지만 배가 고파서 정말 배가 고파서 진짜 엄마 찾는 것을 포기하고 그 먼길을 다시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밤늦게 딸아이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왔는데도 엄마는 어디서 놀다가 이렇게 늦었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울었다. 딸이 집을 나갔다가 돌아왔는데도 엄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분명 가짜 엄마가 분명했다. 배가 고파도 집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했지만 할 수 없이 나는 가짜 엄마와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나의 첫 번째 가출이자 마지막 가출이었다.
어느새 어린 시절의 나는 사춘기 소녀로 변해있었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여전히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고 너무도 가난해서 먹고살기도 버거워 딸아이의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결국 나는 공부보다도 이성에 관심을 쏟았고 밤새워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밤새워 이성 대한 가슴앓이를 했다. 그땐 그 시절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절이라는 것을 몰랐다. 어느 누구도 내게 가르쳐 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데 갑자기 억수같이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그대로 비를 맞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검은 색 자동차가 구정물을 튀기며 지나갔다. 황당한 표정으로 그 자동차를 쏘아보고 있는데 자동차 창문이 열리더니 주인집 아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탈래?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탈 수 없었다. 이미 속옷까지 젖어 있어서도 그랬지만 주인집 아들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리도 창피했는지 모르겠다. 하필이면 나는 주인집 아들을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빗속을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며칠을 감기몸살로 앓아 누워있었다. 몇 달 후 주인집 아들은 결혼을 했다. 내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내가 좋아하고 있다는 고백을 하기도 전에 말이다. 하긴 주인집 아들은 내가 좋아하고 있었던 것도 몰랐으니깐.
빨리 어른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먹고 가고 싶은 곳도 마음대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조건 부자가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을 했던 나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꿈을 잊고 살아가는 치매에 걸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협심증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 나 때문이라고 했다. 위로 오빠를 낳고 나를 낳은 후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산후조리를 제대로 할만큼 여유가 없었다고 했다. 그 이후 엄마는 밤마다 온 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가슴이 아파서 끙끙 앓았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다시 직장으로 나갔다. 돈을 벌기 위해서 말이다. 그땐 몰랐다. 엄마가 아픈 몸으로 자식들 때문에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엄마가 협심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도 엄마가 병원에 입원을 한 후에야 알았다. 어려운 형편에 엄마의 입원으로 내 월급은 고스란히 병원 비로 들어갔다. 그 이후에도 조금 생활이 좋아지려나 싶으면 곧 집안에 형편이 좋지 않아졌고 우리 집은 계속해서 제자리걸음뿐이었다. 반복되는 가난 속에서는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오씨 집안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뿐이었다.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고 하는데 난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엄마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절대로 가난한 사람과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했던 나는 결국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겠다면서 엄마가 그토록 말렸는데도 그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토록 벗어나려고 했던 가난은 지금도 내 몸의 한 부분처럼 따라 다닌다. 후회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으니깐 말이다. 문득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이젠 엄마처럼 살 수 있을지, 엄마만큼만 살아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엄마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훗날 내 딸이 커서 나처럼 ‘엄마는 아빠처럼 가난한 사람과 왜 결혼했어? 왜 나를 낳았어?’하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딸아이가 웃고 있다. 이제 막 눈물을 흘리고 침을 흘리기 시작한 2개월 된 내 딸이. 친정엄마도 어린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행복했을까.
“자기야...우리 딸 왼쪽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어. 자기 왼쪽 엉덩이에도 있잖아.”
이제 막 목욕을 끝낸 딸아이에게 분을 발라주던 남편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랬다. 내 왼쪽 엉덩이에는 몽고반점이 있다. 그래서 언젠가 친정엄마가 나를 잊어버리면 몽고반점만 찾으면 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목욕탕에 갔을 때 엄마의 왼쪽 엉덩이에 있던 몽고반점을 보고 나랑 똑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동안 나는 친정엄마의 왼쪽 엉덩이에도 몽고반점이 있었다는 것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열심히 살 것이다. 훗날 딸아이가 커서 엄마처럼 살고 싶다고 말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자기야...우리 딸이 엄마, 엄마, 하는 것 같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