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엔 노란 꽃들이 제일 먼저 봄을 맞고 있다.
아직 선선한데...
4층인 학원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안에서 거울을 본다.
그래도 아직은...웃어도 본다.
엘리베이터를 내리고 원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마치 써프라이즈 파티마냥 내게 집중하여 몰려든다.
그러나 그 순간의 충격이었을뿐 나에게로 다가오는 아이는
단 한명도 없는데...길에서 만나면 똥오줌도 못가릴것만같은
아이들이 그녀의 곁에 메달려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
아이들을 어루만져주던 그녀가 나를 본다.
"어..왔어?"
생긋 웃으며 일어서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
하얗고 소매가 넓은 블라우스에 긴 플레어치마를 입고 있다.
"왜 놀래?"
"아니...너 그렇게 입고 있으니까 진짜 유치원샘같다."
" 그지? 나의 컨셉이야. 이리와. 이쪽이 원장실이야."
정말 선전에서나 봐왔던 멋진 기종들이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큰 돈 쓴거 보이지? 잘 가르쳐 줘야돼."
"알어. 잘 배우기나 하셔."
그녀는 정말 열심히 배운다.
"아니지, 아니지, 그 툴은 이미지 매킹이라니까...아줌마! 좀!"
그녀가 나를 본다.
"왜 하필 이럴때 아줌마래? "
"아줌마보고 아줌마라는데 뭐가 잘 못됐냐?"
하면서도 말하는 나역시 뭔가 어색하다.
"그래...? 너 그림배워라. 내가 가르쳐 줄께. 너 그림 젬병이쟎아.
내가 자~알 가르쳐 줄께. 초~옹~각!"
"알았어! 취소! 됐지? 그림 얘긴 하지 마라.
중학교때 '양'받은 이후로 그림과의 인연 끊은지 오래다."
"웃겨. 머리만지는 거나 옷입는 거 보면 영 젬병은 아닌것도 같은데..."
"야, 정진영."
"왜?"
"너 날 도대체 뭘로 생각하는 거냐?"
"뭘로? 사람!...아니, 짐승인가?"
"야! 아줌..."
"또..또!"
"아직 말 안했다....근데 넌 기분나쁜 말 안들으려고 하면서 왜 나만 몰아치냐?"
"내가 뭘?"
"아니, 그 걸 누르면..야! 다 지워졌쟎아. 빨리 되살리기해!"
"그래, 누가 말 시키래? 안 그래도 뭐가뭔지 머리아파 죽겠는데..."
"거짓말."
"뭐?"
"잘만하네. 내가 쩔쩔 매던 기본테두리를 이정도로 빨리 하다니..
놀랠 노자다."
그녀가 픽 웃는다.
"왜?"
"너...하나도 안변했구나."
뭐가....?
"하드같은 모습...분명히 차갑고 딱딱하고 인정머리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은 데
막상 한입 물어보면 그 부드럽고 달콤함에 미소짓게하는 마력... 뭐 그런거."
"...너 언제 나 물어봤어?"
"그게 아니라...그래, 인정. 넘 시적이었지? 니 수준을 고려해야하는 건데..."
"어...! 거기는 올가미툴을 사용하는게 편리해. 봐봐.."
하면서 마우스를 집으려는데 그녀가 움찔 물러난다.
한동안 둘이 마주본다.
"...뭐야? 아줌마 왜 그래? 남들이 보면 아가씬줄 알겠네."
애써 컴퓨터로 시선을 돌린다.
"....너...내일 4절 스케치북이랑 4비연필 사와. 톰보우걸루!!!
낼 부터 뎃생기초부터 배운다!!!"
"그럼 나 안와. 돈도 싫으네요..."
베~하고 혀를 내밀자 웃음보가 터진 그녀가 야!!를 외칠쯤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웃음섞인 그녀의 목소리...3초간의 정적...
"듣고 있어."
착 가라앉는다.
일러스트를 고쳐주는 척 하고 있지만 온 신경이
그녀의 목소리에가 붙어있다...
누굴까...? 미국에 있다는 그 신랑인가...?
싶자 무슨 죄진 사람마냥 가슴이 콩닥거린다.
" 그만하자, 나 지금 바쁘거든."
짜증이 묻어난다.
뭐라 웅얼대는 전화저편에서 들리는 건 남자 목소리다...
"안해. 아니, 안돼. 선우야, 우리 이성적으로 대화하자,
선우야!....자꾸 그러려면 끊어... 먼저 끊는다."
그녀는 갑자기 머리를 감싼다.
선우...? 선우가 왜... 무슨 일이지...?
우는건가? 그냥...생각만하고 있는건가...?
갑자기 좁은 사무실이 숨막혀 온다.
"나... 잠깐 화장..."
"나가자."
그녀가 고갤 들고 나를 본다.
"점심먹어야지. 무지 배고프다."
씽긋웃는 슬픈 미소.
마치 우리 둘이 뭔일이 있었던 듯 어색하게 나가는 모습을
교실에 있던 선생들이 흘끔거린다.
드믄드믄 손님들이 앉아있는... 이름은 레스토랑..우리가 보긴 좀 꾸며논 커피숖...
"여기 오므라이스가 맛있어. 가끔 먹으러 와."
뭐라 말을 꺼내야 할런지...담배만 만지작 거린다.
"좀 피울께..."
"너 밥 먹기 전에는 음식맛 상할까봐 담배 안 피쟎아."
그녀가 나를 말끔히 쳐다보고 있다.
안되겠다. 물어봐야 한다.
맘 먹은 김에 이런 챤스에 얘길 해야겠다.
"뭐 주문하시겠습니까?"
하필 이럴때...
"오므라이스 두개요. 아저씨... 제건 좀 맵게...아시죠?"
"네."
하....이미 샌 김을 어떻게 집어 넣고 얘길할까...
그래도 해야돼.
"진영아."
"왜?"
"너...나 아니?...그래, 알겠지...근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내가 그랬어?"
"내가 밥 먹기 전에 담배 안피는 것 같은 건..."
"니가 항상 그랬쟎아. 써클에서 회식할때도 그랬고, 밥 먹기 전에는 담배안핀다고...
그래서 난 맘 속으로 바랬지...정지우 밥 먹지 마라...."
"왜? 왜 내가 밥 안먹길 바랬는데?"
"내가 니 옆에 앉아 있었거든. 담배연기 나 딱 질색인거 알쟎아."
"...내가? 난 몰라. 솔직히 니가 담배피우는 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그녀의 눈이 무표정하게 변한다.
뭐지...? 저 표정은...? 무슨 느낌이 전달되질 않는다.
"우리 써클 다니던 시절에...내가 니 담배연기 싫다고 그렇게나 많이 얘기했는데
기억안난다니... 할 수 없다."
"그랬나? 그러면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데?"
"걱정마, 너한텐 뽀뽀 안할테니까...그랬지."
그러자 어설프게 기억이 난다.
담배필때 마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내 옆에 와선 늘 담배냄새가 싫다며 끄라고 했던 촌스런 고등학생같기만하던 아이...
내가 그렇게 말하면 금새 얼굴이 빨갛게 되어 저만치 떨어지던...
" 너...수상해...그때 나하고 뽀뽀하고 싶어서 일부러 그랬지?
이번엔 해줄까...하고."
"맞아."
"뭐?"
오히려 내 얼굴이 빨개질 지경이다.
"그러다 보면 니가 장난삼아라도 진짜 해버린다!하면서 다가올줄 알았어.
근데...안그러더라."
"왜 다가오면 어쩌려고?"
"어쩌긴...내 첫키스 너 주려고 그랬지."
오므라이스가 등장한다.
그녀밖에 보이지 않는 내 스크린 앞에....
"그게 무슨 뜻이야? 너 나 좋아했었어?"
"어디 나뿐이었겠냐? 우리 써클 여자애들 다 너 좋아했지.
외모에다 학벌에다 집안까지 빵빵한 널 싫어했다는 게 더 내숭 아닐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므라이스를 먹는다.
뭐가 뭔지... 그럼 아무것도 아니란 건가?
"맛어때?"
"어! 너무 매워...뭐야? 무슨 오므라이스 맛이 이래?"
"너 매운거 싫어해서 내거만 맵게 해달라는 거였는데...괜찮아?
내 물이라도 마실래?"
"뭐야!"
내가 듣기에도 내 목소리가 너무 크다.
그녀의 경직된 모습을 보며 다시 목소리를 다듬었다.
"너 내가 매운거 싫어하는 것까지 알아? 니가 나에 대해 모르는게 뭐니?
그게 더 궁금할 정도다."
"그래서?"
"뭐?"
"그게 화낼 일이냐구."
" 나 지금 화내는 게 아니라 이상한거야. 과거의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한숨을 쉬며 물을 마셨다.
컵을 만지작거린다.
분위기를 봐서 그녀는 말을 할것 같다.
준비됐어...빨리 말해...!
"사실...너한텐 말 안할려고 했는데...다 지나간 일이니까..."
"뭐...?"
"기억나니?.... 김지영."
"김...지영...?"
"국문과 ... 우리 학번."
" 아... ! 그 가슴컸..." 아차! 이게 아닌데...
"그래. 가슴컸던 애. 기억하는 구나... 딱 한달만 사귀었쟎아...걔가 내 친구였어."
난 탁자위에 숟가락을 놓았다.
"그만 갈께. "
그녀가 탁자를 넘어와 내 팔을 잡았다.
"듣구가."
"듣고 싶지 않아."
"나도 그래. 지금와서 널 힐책하겠다는게 아냐...
그냥 니가 너에 대해 잘 아는 날 이상해하니까...
말을 하게끔 만든건 너야."
지난 날이 생각난다.
한동안 김지영이라는 아일만나 그 큰 가슴에 묻혀 헤어나오지 못한 적이 있었다.
밤이나...낮이나...그 땐 걔나 나나 피끓는 스물하나.
미래를 생각할 노련함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 그때 얘기 계속해서 미안한데...짚고 넘어가자.
나 지영이랑 둘도 없는 사이였어. 그냥 걔가 나고, 내가 걔일 정도로...
첨에 너랑 사귄다고 했을때 사실 질투도 났었어 ...너 같은 킹카는 흔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다른 여자일바에야..라는 생각에 기뻐하기로 했는데...근데...니가 오해했었던..."
죽기보다 듣기 싫다.
"나 간다."
일어서려는 날 그녀도 일어나 잡는다.
"니 애였어."
"아냐. 걔가 아니라고 했어."
"지영일 몰아붙인건 너야. 지금처럼... 똑같았겠지..."
다른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지만 신경쓸 여력이 없다.
아까 주문을 받았던 남자가 다가왔다.
"원장님. 오늘은 그만..."
"죄송해요. 사장님! 오늘 일은 잊어주세요."
그녀가 빙긋 웃자 그 사장이란 작자도 따라 웃는다.
뭐하는 놈이야? 나에게는 슬쩍 눈을 흘기고 있다.
레스토랑을 나오자 밖은 눈이 부시다.
"내 차타고 가."
"안해. 난 큰 차가 더 좋아."
"지영이 일로 우리가 이럴건 없쟎아....바다갈래?"
"학원은?"
"원장 하루 비워도 안 무너져."
나 역시 이런 기분으로 골방에 처박히긴 싫었다.
그리고 난 그녀에게 아직 물어볼 말이 남아있었다.
"이렇게 좋은 차를 타고 다녀?"
"뭐가 좋아? 그냥 가끔 학원 아이들 태울때도 있어서 큰걸 샀을 뿐이야."
"껌 씹을래?"
"응."
"담배는 사절이야. 내 차에선 안돼."
"걱정마 너한텐 뽀뽀 안할테니까."
풋~ 그녀가 웃음을 터트린다.
"야~ 우리 나이엔 키스라고 해야하는 거 아냐? 뽀뽀라니까 넘 유치해."
"호오~ 그러면 내가 해 줄 까봐? 유부녀 건드리다 수갑찰 일 있냐?"
그녀가 말이 없다.
아줌마 비슷한 얘길해서 그렇나? 적응 될 때도 됐는데...?
"지영이 결혼한거 알아?"
"...."
"소식 못들었어?"
"또 시작이야?"
"아직 못 끝냈쟎아. 난 그런 거 못 참아."
"그런 말은 밤에 신랑한테나 해라."
"진우야. 좀...웃긴말이긴 한데...니가 알아야 할게 있어."
창 밖으로 아직 가지만 앙상한 나무들이 스쳐지나 간다.
완연한 봄은 언제쯤 오려나...
"걔가 몸안에 사정을 허락한 건 너 하나였어."
"그때나 지금이나 그건 증명 안돼."
"그래. 나도 그걸로 많이 싸웠어. 다른 남자들에겐 그렇게나 철저한 애가
왜 너한테는 모든 걸 허락하는 지...너를 정말 사랑했던 거야...
안 믿는구나...지영이 엄마에 대해선 아니?....걔 엄마가 미혼모였어. "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남자에게 허락했겠냐구... 엄마삶을 봤는데...왜 네겐 그랬는지...
가끔 이해가 되다가도 안돼....그때 병원가구서 그랬는지...
결혼 2년짼데 임신이 안된데..."
"이젠 어쩔 수 없쟎아."
"어쩌라는 건 아냐. 그냥 사실을..."
"사실? 그래, 사실 안다고 쳐. 그래서?
내가 스물하나에 애아빠가 되기라도 했어야해?
서른이 되도록 지지리 궁상인 내게 걔가 시집왔었다면 행복했을까?"
"그랬다면 어디든 취직했겠지."
"그랬겠지, 마누라와 새끼때문에 판사꿈 접었다고
우리집에선 난리도 아니였을꺼고...
사업망한 것도 다 며느리 잘 못 들어와서 그렇다고 뒤집어 씌웠겠지."
"...그런줄은 몰랐어."
"아! 찾았네. 나에 대해서 모르는 거."
"난 또 부자집 아들이 공부합네 생색이나 내려고 그러는 줄...미안하다."
난 의자를 눕혀 누웠다.
"아...고추친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일을 너하고 얘기하게 될 줄 몰랐다."
"그래? 난 너 호프집에서 만났을 때부터 말해주고 싶었는데..."
"난 또...니가 스토커거나 날 짝사랑했었는 줄 알고..."
"전자는 아니고 후자는 맞는데?"
"진짜 니가 날 짝사랑했다면 이렇게 말 못하겠지."
" 다 지나간 일이쟎아. 이제 우리도 서른이야."
서른....그래...서른에 말하는 짝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낡은 앨범에서 꺼낸 오래된 사진 만큼이나 아련한 것일까?
아님 그저 무덤덤한 지나간 얘기일 뿐일까...
그러고 보면 김지영...그 애는 내게 사랑같은 느낌은 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죄책감에 마음이 안좋고 생각하기가 싫다.
모든 시간을 뒤로 한 채 봄이 오는 바닷가로 우리는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