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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봄


BY happygire 2004-08-11

 

삐걱거리며 열리는 대문이 오늘따라 더 을쓰년스럽기만하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털털거리며 내려가 한두평밖에 안되는 슈퍼에 들어선다.

 

선반이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물건들 모두 가격표를 내밀고 있다. 라면 몇 개랑  담배 두갑을 산다.

"어제 니 엄마 왔다간거 알긴 허냐?"

이모는 먼지 수북할 것 같은 담요로 다리를 덮은채 살에 묻혀 반밖에 떠지지않는 눈을 굴리며 물었다.

"네."

난 천원짜리 세장을 내민다.

 

두껍고 손톱이 검게 뭉겨진 이모의 손이 돈통에서 동전 몇개를 집어낸다.

"이쟈 7급공무원인가 뭐시긴가 공부한다믄서?

나가 느그 엄만테 낯이 안서야.

그랴도 이모곁이라고 서울꺼정 보내놨는디 4년동안 공부안허는 놈을

기냥 내비뒀나허고 월매나 속으로 원망을 헐 것이여?"

난 고개만 숙인채 잘 열리지도 않는 슈퍼문을 기어코 열고 나온다.

"옘병...법관은 무슨...우라질.."

이모의 푸념이 진눈깨비에 흩어진다.

 

눈이오네...이제 3월인데...봄은 언제 오려나....

 

막 집으로 들어서려는데 문옆에 우편엽서가 끼어있다.

"사진사랑 동문회에 초대합니다."

내일이네...시험도 끝났겠다 한번 가볼까?

 

갑자기 슬리퍼사이로 찬바람이 휭하고 불러든다.

 

얼른 방으로 뛰어갔다.

 

 

높고 높은 달동네에서 서울 시내까지 나가는 일이란 쉬운일이 아니다.

 

버스를 타러 아랫마을까지 걸어내려가고, 지하철을 타고, 갈아타고...

두시간은 족히 걸려 도착한 호프집앞은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두리번대며 이놈들 어디 앉았나...찾았다.

"여어~"하고 손을 흔드는 선우가 보인다.

쟈식 술좀 됐네...하고 다가가는데

못보던 얼굴이 나를 바라본다.

하얗고 갸름하고 머리가 길다. 눈이 커지더니 나를 보며 생긋웃는다.

누구지...?

"야~정지우 판사... 오랫만이다!"

손을 내민다. 얼결에 잡았다.

"누구..."

"앵? 나 몰라? "

하자 옆에 있던 선우가 거든다.

"왜 이래 짜샤. 늦게 오면서 벌써 취했어? 진영이쟎아."

진영...

"전진영?"

"이제 기억나? 이래서 어디 판사되겠냐?"

"판사는 무슨..."

얼핏 그녀를 훔쳐보다 들킨다.

"왜? 내 얼굴 이상해?"

"너 왜 이렇게 예뻐졌냐?"

"그래? 옛날엔 어땠는데?"

"옛날? 좀 ...무지하게 순박하고...너무 내츄럴했지."

"어, 맞아! 나 그땐 화장은 날나리들만 하는 건줄 알았거든.

3학년때 겨우 분발랐을 정도였쟎아."

시원스런 말투와 눈매, 갸녀린 팔과 뭔가 부족한 듯한 미소,

그녀의 모든 것이 묘한 매력을 가졌다.

 

지금 모습과 학교 다닐때의 전...진영인데요....라고

떠듬대던 모습은 매치가 힘들다.

 

 그 때의 난 법대생입네...하면서 얼마나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는지...

학교에서 내노라는 여자들은 모두 나와 자고 싶어 안달이던 때가 있었지...

"어떻게 지내?"

"나? 아직 미술학원하지."

아...미대생이었지..

"원장?"

"원장."

"이야~ 잘나가는데?"

그녀는 그냥 웃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얼굴을 쓰다듬고 싶다.

내 손위로 그녀의 알 수 없는 고민들이 묻혀 나올 것만 같다.

 

그때 술만되면 개가되는 선배하나가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야, 전진영. 너 왜 이렇게 색쉬하게 변했냐? "

"왜이래 선배. 내거 보기엔 선배도 만만치 않은데?"

"그래? 웋ㅎㅎㅎ! 그럼 우리 섹쉬한 사람끼리 이 긴밤을 불태워볼까?"

영철선배의 손이 진영의 어깨를 감싸왔다.

"선배! 왜 이래요?"

옆에 앉아 있던 선우가 정색을 한다.

원래 불의를 부면 불끈하는게 자식 성격이다.

"왜이래? 니가 재미보고 싶냐? 안돼지, 안돼, 난 이 밤 불태워야돼."

"왜 이 밤만 불태워? 그 감자, 저 고구마도 불태우지?"
한 방 맞은 기분... 그녀의 상큼한 미소와 거침없는 말투...

야, 졌다 졌어라며 손사레를 치며 가버리는 선배...뭔가 알수 없는 기운.

 

술자리가 끝나고 호프집앞에 웅성거리며 서있다.

 

이렇게 나오니 그녀가 내 어깨를 조금 넘어선다. 165?

"집이 어디야? 아직도 학교 밑이니?"
그녀는 대답없이 묘하게 웃는다.

"너희집 학교 밑 아니었어?

그 무슨 당구장인가 하는 건물이 너희 집거라

그 꼭대기에 살았었쟎아?"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까 그 영철선배가 완전히 망가진 모습으로

진영의 어깨를 와락 안았다.

"진영아....가지마...나랑 같이 가자."

"선배.. 취했어요."

그녀의 힘으론 물리치는 것이 역부족이었다.

"너 이 밤 외롭쟎아. 나도 그렇거든...

내가 찐하게 해줄께...진영아."

해도해도... 도를 지나친 모습에 선배!를 외치려는 데,

1기 경수선배가 다가와 영철 선배를 제지했다.

"야, 영철아. 그만해. 후배들도 보는데..."

"아, 선배...내가 뭐 잘못했어요? 얘가 너무 쓸쓸해하니까...내가..."

"시끄러! 안그래도 남편이 외국에 나가있어서 맘 심란한 애한테...

그게 할 짓이야? 진영아, 늦었으니까 그만 들어가라."

"네, 선배 안녕히 계세요."

"그래, 알지? 쨔식 이래도 멀쩡할땐 좋은 놈이란거.

니가 이해해라."

고개를 끄떡이며 그녀가 돌아선다.

 

멍청하게 입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결...혼...했어...?

휑한 바람이 가슴구멍을 지나간다.

"야, 그래도 봄은 봄이다. 바람이 벌써 순하쟎아?

우리 2차갈까?"

떠드는 소리가 웽웽거린다.

 

내나이 서른 .... 봄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