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의 말이 심상치 않음을 아는지 이 진성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길고 단단해 보이는 손가락 사이의 담배는 앙증맞아 보였다.
담배 연기를 한 번 길게 내뿜은 이 진성은 그 손으로 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렸다.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는 소리라면...굳이 하지 않아도 돼요. 나 또한 서른 여섯 생을 살면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왔고 죽고 못사는 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랑 비슷한 경험도 해 봤소.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은 당신과 나와는 상관없는 과거의 일이 아니겠소? 과거가 오늘이나 미래보다 중요한 건 아니지...]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아니더라도 문제가 될 수는 있죠.]
재희는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쓸쓸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문제라? ... 그건 상대방이 완벽할 때 해당되지 않겠소? 당신이 고백하면 나도 고백해야 된다는 얘긴데, 솔직히 난 얘기 하기 싫소.
깨끗이 끝난 과거 얘기를 꺼낸다면 그 여자들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기 때문이오. 서로 원수져서 헤어진것도 아니기 때문에 난 조용히 묻어두고 싶소.
당신 또한 지금 그 남자한테 메여 있는 게 아니라면, 현재 진행중이 아니라면 그냥 침묵해요.
그리고 그 남자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배신을 안겨 주었다면 과감히 잊어요.
그게 당신을 위한 것이고 진정으로 그 남자에게 복수하는 길이니깐...]
[당신은...당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당신의 과거에 대해 묻는다면 어쩌실래요?]
그가 다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면...]
그가 빙긋 웃었다.
[이미 오래전에 끝난 그런 사소한 사생활에 목숨걸지 않을거라 확신하오]
그의 눈빛에 재희의 심장이 두근댔다.
그냥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담배를 껐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건, 당신 과거가 어떠했던 간에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요. 나보다 먼저 당신을 만난거에 대해 질투야 하겠지만 얘기를 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는 소리지. 어떻소? 그래도 하고 싶다면 해요. 내 들어 주리다]
입을 열 수 없었다.
재희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굳이 얘기 할 필요가 있을까 새삼 의문이 생겼다.
그와 계속 만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럼 이렇게 합시다. 오늘 말고 다른 날, 당신이 정말로 얘기하고 싶을 때 그때 하기로.
그 때는 말리지 않겠소]
[그 말은 우리가 계속 ...만나야 한다는 그런 소린가요?]
[그렇소. 난 지금 당신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는 중이오. 나란 인간, 한번 겪어 봐요. 아마 후회하지는 않을거요]
그가 나직히 웃었다.
[머리 굴리지 말아요. 다 보이니깐...음, 앞으로 24시간 생각할 시간을 주리다. 내일 1시 정각에 전화하겠소. 잡다한 생각일랑 버리고 마음이 가는대로 대답해요. 알았소?
휴대폰 번호 대봐요. 이건 내 번호]
그가 명함을 꺼내더니 그녀의 지갑속에 속 집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