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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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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빗장을 열고


BY 데미안 2004-10-08

 

한적한 커피숍에서 재희는 이 진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에 대고 그가 뭐라고 했던가?

[빚은 안 갚을거요? 커피나 한 잔 합시다. 우리 가게로 오라고 하면 싫다고 할거고...건너편 올드팝이란 커피숍이 있어요. 분위기가 괜찮아 재희씨도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와요. 12시에. 올때까지 기다린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렇지만 무조건적인 명령조는 아니었다.

재희에게 이렇다할 거절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녀가 물잔을 입으로 가져 갈 무렵 문이 열리고 헌칠한 이 진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끔한 양복 차림이었고 재희를 발견한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가슴속에서 작은 파문이 가벼이 일었다.

[내가 늦은 게 아니고 당신이 일찍 온 거...맞소? 나란 인간, 빨리 만나서 빨리 빚 갚고 빨리 떨궈 버리고 싶었소?]

장난기 섞인 시원스런 그의 말투에 재희는 찔린 듯 움찔하며 얼굴에 희미한 홍조를 띄었다.

그가 웃었다.

[당신은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요. 그런 소리 못 들어봤소?]

하면서 그가 자리에 앉았다.

종업원이 왔다.

그녀는 커피, 그는 쥬스를 시켰다.

 

[며칠 소식이 없자, 이 인간이 이제 포기했구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소?]

마치 알고 있다는 듯 그가 말했다.

그녀는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알면서...굳이 확인 사살을 할 필요가 있으세요? 아니면 절 놀리는 게 재미 있으세요?]

그가 한 쪽 입가를 살짝 올렸다.

[난 내가 마음에 둔 것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스타일이오. 두 번 만나든 이백번을 만나든 횟수가 중요한 건 아니잖소. 내 마음이 당신을 따라가고 있는데 어쩌겠소.

내가...싫은거요?]

[싫어요...]

[내가...좋은거요?]

[싫어요...!]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토해내는 그녀를 보며 그가 빙그레 웃었다.

아차 싶었다. 그의 수법에 말려 든 것이다.

[당신은 나오면서 이미 그 말을 연습한 것 같군...]

그녀의 얼굴이 다시 붉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무에가 그리 두렵소? 예전의...누군가에게 받은 상처가 그렇게나 깊은 거요? 아니면 아직도 사랑이 남아서 그렇소?]

[이런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엔...]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글쎄...그건 당신 생각이고. 난 이미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어요. 조금도 어색하지가 않소. 마치 늘 만나던 사람을 좀더 가까이서 만나고 있다는 느낌이오.

나란 인간,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내게 기회를 주지 않겠소?  좋은 느낌의 여자를 만난다는 건 쉽지가 않소. 그냥 스쳐 보내면 내 인생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거요.]

[저의 어디가 좋다는 거죠? 어떤 점이, 뭘 보고 좋다는 거죠? 저란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당신은 나란 남자에 대해 아는 게 있소?]

[......!]

[없으면서 당신은 무조건 싫다고만 하잖소. 남녀관계란  원래 모른는데서 출발하는 게 아니오? 출발선에서 같이 한번 가 봅시다. 가다가 영 아니다 싶음...그런 일이 없길 빌어야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당신이 원하는대로 해주겠소. 약속하리다.]

그의 말투, 그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진지했다.

 

나는 왜 이 남자의 말에 거절을 하지 못하는걸까...

왜 매몰차지 못하는건지...

왜 이다지도 마음이 혼란스레 일렁이는지...

재희는 그런 느낌들이 싫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사랑을...해 본 적 있으세요?]

[......!]

[그 사랑에...배신 당해본 적 있으세요?]

재희는 마음의 빗장을 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