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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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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운 만남


BY 데미안 2004-10-06

 

[난...내가 싫어. 그 남잔 아마도 날 바보 같은 여자로 봤을거야. 어린애도 아니고 그렇게 도망치듯 뛰쳐 나올게 뭐람.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다 화끈거려. 그냥...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일이 없음 좋겠다고 정중하게, 딱 잘라 말했음 나 자신도 떳떳하고 그 남자에게도 덜 미안했을텐데...정말 바보같은 행동을 했어]

재희는 사무실 바깥 벤치에 앉아 미혜에게 하소연 하듯 털어 놓았다.

[그 사람한테 미안해서 신경쓰이니? 그 사람한테 바보같아 보였을까봐 그게 신경쓰이니?]

가만히 재희를 건너다보면서 미혜가 말했다.

[뭐? 무슨 말이야?]

[그 사람, 신경 쓰이냐구? 너, 남자땜에 심각해 보이는 거 얼마만인지 아니?]

[심각하긴 무슨! ]

[너 지금껏, 다른 남자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든 한번도 신경쓰지 않고 살았어. 알어?. 이 건우...]

미혜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재희는 뜨끔했다.

[이 건우...그 놈은 널 남자 기피증 환자로 만들어놓았어. 언제 한번 남자한테 관심이나 있어 봤어?  너의 외삼촌이 그만큼 선보자고 했을때, 강제로 약속 장소 잡아뒀어도 넌 나가지 않았어.

이 건우 때문이란 거 알아. 그를 사랑해서라기보다 그 놈이 준 상처땜에 다른 남자를 만나지 못한다는 것도 알어.]

[그만해...]

[그 남자, 만나. 만나자고 하면 만나라구. 무엇이 두려워서 움츠리는거야?  10년이나 지난 일땜에 평생을 혼자 살거냐구. 이젠 잊어 버릴때도 됐어. 묻어 버려.

사랑이 준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하란 말이 있어. 그 남자...!]

[싫어!]

냉정한 어투로 재희는 미혜의 말을 잘랐다.

[됐어. 더 이상 말하지 마]

재희는 미혜를 버려두고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미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잊는다 게 그렇게 힘이 드니?]

미혜는 혼자 중얼거렸다.

 

...잊는다는 게 힘이 든 게 아니라...난 그 때의 그 상황을 잊을 수가 없는거야...

어두운 밤.

재희는 사무실 창가에 앉아 생각에, 아니 과거속에 잠겼다.

미혜가 그녀의 과거를 꺼집어 낸 건 처음이었다.

이 건우. 그의 이름을 입밖에 낸 것도...

 

건우와의 만남은 재희에게 행복이었다.

부모가 주는 사랑보다 부모와 함께하는 행복보다 더 의미가 깊었다.

그 날, 재희가 건우와 헤어지고 집에 온 시각이 새벽 1시 30분이 조금 지나서였다.

일요일 아침이면 재희는 부모님과 함께 집앞 공원 약수터로 산책을 다니곤했다.

그러나 그 날 아침 재희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따라 나서지 않았고 부모님은 하나뿐인 딸, 곤히 자게 내버려둔 채 산책을 나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부모님은 술이 덜 깬 채 졸음 운전을 하는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

그 때의 그 충격...

 

재희는 두 팔로 몸을 감쌌다.

그 일은 그녀를 졸지에 고아로 만들었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건우가 보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보살펴 주길 바랬다. 옆에 있어주길 원했다.

하지만 그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며칠 째...소식 두절이었다.

부모님의 사고 소식보다 그의 소식 두절이 그녀에겐 더 큰 고통이었고 두려움이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도 그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단 한번이라도...단 한번이라도 연락이 되었더라면 .......

건우는 재희가 그를 가장 필요로 할 때 그녀를 버린 것이다.

재희는 그것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을 잊는 게 더 어렵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건 그 보다 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재희는 이 진성을 떠올렸다.

그는 여러모로 건우를 떠올렸다.

건우도 그 사람만큼이나 밝고 항상 자신감에 차 있었다.

건우도 그 사람만큼이나 사람을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 사람도 오빠처럼...날 웃게 만들었어.....]

속삭이듯 재희는 가만히 내뱉었다.

[그래서...싫어.]

차가운 말투였다.

 

며칠이 흘렀다.

재희는 한동안 전화벨이 울릴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장했으나 이 진성은 아니었다.

그에게 빚이 있다는 게 영 찜찜했으나 그냥 그렇게 ,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이었음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고 재희는 평소때와 다름없는 생활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이, 우리 오늘 영화나  한 편 땡길까?]

토요일 오전 11시.

일이 일찍 끝나자 미혜가 슬쩍 다가와 말했다.

[오늘 남편이 애들 데리고 시댁 간다고 했거든. 난 뭐 필요가 없댄다. 어때, 나랑 데이트할래?]

[시댁에나 가셔]

[야아~ 영화보러 가자. 진희 불러내서 술도 한 잔 하고. 딱 한 잔만. 응?]

코맹맹 소리를 내며 미혜가 애교를 떨자 재희는 웃었다.

재희는 미혜가 자신을 위해 가끔, 일부러, 그렇게 시간을 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뭐 생각해둔 영화라도 있어?]

전화벨이 울렸다.

[보고픈 영화야 많지~]

하면서 미혜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미혜가 손으로 수화기를 막으며 재희를 바라보았다.

[이 진성이라는데?]

재희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