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스케줄이 어떻소?]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시면서 그가 물었다.
[예?...뭐 크게 바쁜일은 없지만..그래도...]
[그럼 재희씨의 오늘 하루는 나한테 맡기는게 어떻소? 서로 집에 들어가봤자 반길 사람도 없는데 모처럼 기분 한 번 내 봅시다. 재희씬 뭐 해보고 싶은게 없소?]
[글쎄요...뭐...!]
그가 일어섰다.
[일단 나갑시다.]
성큼성큼 카운터로 향하는 그의 뒤를 재희는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여는데 그가 빨랐다.
[아뇨! 계산은....!]
[갑시다]
그가 뒤에서 그녀를 밀었다. 밖으로 나오자 그녀는 그를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이런 법이 어딨어요? 제가 산다고 약속했잖아요]
[그 약속에 내가 동의 했던가요? 그런 기억이 없는데.]
[아니, 처음부터 제가...!]
[계산이야 아무나 하면 어떻소? 갑시다.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는데 혼자 보기가 뭐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거나 보러 갑시다]
남자와 영화본지가 언제였던가.
아마 10년은 넘은 것 같았다.
이 건우. 그는 음악을 좋아했고 재희는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를 보고 책방에 들러 구경하고 차를 마시고...
레코드 가게에 들러 음악을 듣고 시디를 사고 라이브 음악이 나오는 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캄캄한 극장 안에서 건우와 재희는 늘 손을 꼭 잡은 채 영화를 봤다. 땀이 나도 건우는 재희의 손을 놓은 적이 없었다.
행복이었다.
그 작은 접촉에도 재희는 떨리고 황홀하고 행복했었다.
그 행복이 영원할 줄 알았다.
그게 서로를 향한 사랑이고 그 사랑이 영원인줄 알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재희는 추억속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이 진성이 아니라 이 건우가 앉아 있었다.
하지만 재희는 그 때의 재희가 아니었다.
눈물이 났다.
그냥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재희는 내버려 두었다.
화면이 겹쳐지면서 서서히 주인공이 바뀌고 있었다.
공 재희와 이 건우로...
그들은 자전거를 타면서 교내를 달리고 있었다.
재희는 건우의 허리를 두손으로 꽉 잡은 채 그의 따스하고 넓은 등에 볼을 대고 있었다.
건우가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파릇파릇한 잔디에 팔베게를 하고 누워 재희는 건우에게 시를 읽어 주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초록빛 사랑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재희는 일어났다.
이 진성. 그에게 잠깐 실례한다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화장실로 들어 갔다.
눈을 꼭 감은 채 눈물을 다 떨궈 냈다.
그리고 다시 화장을 고쳤다.
눈주위가 그래도 발갛게 익어 있었다.
매점에서 음료수와 팝콘을 샀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고맙다고 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재희는 미안하다고 작은 소리로 사과를 했다.
재희와 진성이 다시 <무랑루즈>로 돌아왔을때 시간은 다섯시를 넘고 있었다.
[덕분에 오늘 정말 즐거웟어요]
[그럼 이제 재희씨가 내게 은혜를 갚을 차롄가요?]
빙그레 웃으며 그가 말했다.
[제가...술 한잔을 살까요? 아니면 저녁으로 할까요?]
[음...재희씨가 저녁을 사고 내가 술 한잔을 사죠. 공평하지 않소?]
[공평한 장사는 아니죠.]
라이브 음악이 시작되었다.
대학생인듯한 여자가 스툴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이곳에서 노래를 하는 사람이 몇명이나 돼죠?]
[다섯명. 왜 재희씨도 생각이 있소? 그렇다면 언제든 환영이오]
[저런! 전 노래는 잘 못해요]
그러자 그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웃었다.
[사장님은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사람을 끄는 매력도 있고...그런 소리 많이 듣죠?]
[그런소리..재희씨한테서 처음 듣는데... 남자로서의 나는 어떻소?]
[......!]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로서의 나는 좋소? 싫소?]
[그, 글쎄요...겨우 두번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는 게...싫고 좋고를 말하기엔...!]
[난 재희씨가 좋소]
그가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재희의 가슴이 쿵 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사무실에 걸려 있는 재희씨의 사진을 본 순간부터 솔직히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빌었소. 그런데 우연찮게 당신을 만났고 난 감사했소. 당신이 낯설지 않아요. 이런 기분도 처음이고...그래서 난 당신만 허락한다면 계속 만나고 싶소. 허락...하겠소?]
말문이 막혔다.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갑자기 몸이 떨리기 시작하자 재희는 벌떡 일어났다.
[죄, 죄송해요. 가야...겠어요.]
재희는 그를 외면한 채 얼른 <무랑루즈>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누가 쫓아 오기라도 하는 듯 얼른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