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구?]
[어떤 남자가 계속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고. 니가 아는 사람이냐?]
비가 내리고 있는 5월 어느 날이었다.
재희는 미혜와 함께 k대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그 대학은 지방에서는 알아주는 일류대라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건 학교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장미였다. 장미는 마치 대학을 보호라도 하듯 손에 손을 잡은 채 엉켜 있었는데 꽃이 피는 5월이면 그 자태에 빠져 가던 길도 멈춰 서는 이가 한 둘이 아니었다.
재희는 처음부터 장미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아름답다는 것 외엔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작년 미혜를 따라 대학로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재희는 숨이 막혀오는 걸 경험했다.
5월의 태양아래 부서지듯, 아니 시위하듯 흐드러지게 그 빛깔을 뿜어내며 피어있던 장미...담장을 에워싸며 눈부시게 자태를 뽐내며 핀 장미를 본 순간, 재희는 머리속이 빠알간 보석으로 부서지는 환상속에 빠져 한참을, 참으로 한참동안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장미를 왜 장미라 하는지 왜 아름답다고 하는지 왜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재희는 스스로 미혜의 손을 잡아 끌고 다시 그 자리에 선 것이다.
어제도 왔었고 그리고...비 내리는 오늘도.....
[야야, 저 남자 온다 와! 미쳤어 미쳤어. 우야믄 좋냐, 응?]
호들갑을 떨며 미혜가 재희의 팔을 마구 때렸다.
그랬다. 한 남자가 우산을 받쳐 들고 그들 쪽으로 오고 있었다.
재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난 모르는 남잔데, 니가 아는 사람 아니냐? 니 아는 남자 많잖냐]
[야, 저 남자는 아니다. 아무래도 대학생 같은데?]
두 여자애가 쫑알대는 사이 남자가 그들 앞에 다가섰다. 남자의 서글서글한 눈빛이 곧장 재희에게로 향했다. 남자가 미소 지었다. 순간, 재희는 그 남자의 미소에 까닭모를 아련한 그리움을, 미혜는 자릿한 설레임을 느꼈다.
[니들...어제도 왔었지?]
남자는 다짜고짜 반말이었다. 기분은 나빴으나 싫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남자의 인상이 너무 해맑고 섹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는 사복을 입고 있어서 대학생인가 했는데...]
남자는 다시 씨익 웃더니 두 여자의 교복 차림을 쭉~ 훑어 보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몇학년?]
[아저씨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요? 그리고 왜 묻는건데요?]
미혜가 삐딱하게 서서 되물었다. 남자는 다시 웃더니 갑자기 손으로 재희의 머리를 살짝 헝컬었다.놀란 재희가 흠칫 뒤로 물러서자 남자의 웃음은 더 깊어졌다.
[이 녀석한테 관심있어서. 너무...어리면 안되거든]
남자의 단도직입적이고 당돌한 태도에 재희와 미혜, 둘다 입을 딱 벌렸다.
[어제 학교로 들어가려는데 니들이 눈에 들어오더라? 특히 이 녀석...넋을 잃고 장미를 보더군. 그 모습에 나도 넋을 잃었고]
남자가 살짜기 소리내어 웃었다.
남자는, 당장 바쁜 일이 없었다면 그녀를 붙잡고 대쉬했을 거라고, 일 끝나고 혹시나 하고 나와봤는데 없어서 허탈했다고, 혹시나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닌가 눈 부릅뜨고 찾아봤다고, 혹시나 오늘 또 오지 않을까 종일 기다렸다고, 그래서 드디어 만났다고...하는 소리가 재희의 귀에는 그저 윙윙 하는 소리로만 들렸다.
황당하고 당황스럽고 어처구니 없었다.
[아저씨 지금 얘한테 작업 거는 거예요? 그것도 고딩한테? 보아하니 나이 좀 잡수신 것 같은데 올해 몇이나 되셨수?]
반은 황당하고 반은 흥미롭다는 말투로 미혜가 물었다.
[나?대학 3년생. 나이로 하면 스물 넷. 군대필. 이름은 이 건우. 몇 학년?]
그가 재희에게 묻고 있었다. 피식. 하고 재희가 웃었다.
[근데 왜 이 녀석이라고 하죠?]
재희가 물었다. 그게 기쁜지 남자는 하얀 이가 보이도록 웃었다.
[모르겠어. 너 첨 본 순간 그렇게 부르고 싶더라]
[나는 눈에도 안 들어 온단 말이지]
미혜가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눈은 흥미롭게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학교 축제 기간 인 거 알지? 괜찮다면 내가 구경시켜 줄까?]
[좋죠!]
구경은 무슨. 이미 속속들이 다 아는데. 미혜와 심심하면 놀러 오는 곳이 아닌가. 그러나 재희가 그 말 하기도 전에 미혜는 이미 승낙을 하고는 재희에겐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 남자, 이 건우와의 만남은 비오는 5월 어느 날 그렇게 시작 되었다.
공 재희 나이 열 아홉에 사랑은 그렇게 찾아왔다.
딩동...딩동...
입질이 왔다는 신호가 계속 들려 왔다.
재희가 과거속에서 빠져 나왔을 땐 이미 늦었다.
고기를 놓치고 말았다.
-어디 갔다 온거냐-
카제짱이 묻는다.
재희가 잠깐 한눈 판 사이 오즈의 친구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있었다.
-어, 미안요. 잠깐 좀 ㅎㅎㅎㅎ....-
-난 또 잠수한 줄 알았네-
잠수란 낚시대만 던져놓고 다른 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소리다.
-공주 누나. 안뇽~~업 ㅊㅋ-
-ㅎㅎ 고마워 바람아-
또 한 남자. 그들과 함께 낚시 하는, 아이디가 하늘바람인 남자. 그는 스스로를 스물 다섯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성인용품점을 하고 있다고 얘기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오늘 비가 와서 그런지 기분이 영 꿀꿀이다. 이따 나이트에나 가야것다. 관심 있는 사람, 요요~ 붙어라~~-
하늘 바람은 분위기 메이커다. 언제나 즐겁고 행복해 하는 사람이다. 하늘바람때문에 입질 오기까지의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아서 좋다.
얼마전에 애인과 헤어졌다고 시무룩해 하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새로운 여자가 레이더에 포착되었다나 어쟀대나 하면서 수선을 떨었다.
하늘 바람은 이별이 만남보다 쉽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공 재희에겐 아파도 아파도 늘 아픔으로 머물러 있는게 이별하던 그 순간인데...
아니다.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이별을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