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거운 눈을 억지로 감고 어둠 속에서 천천히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
그러나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에 스멀스멀 기어들기 시작해 도대체 어디까지 셌는지 금방 잊어버리고 또다시 처음부터 다시 세야만 한다.
할수없다. 방법을 바꿔야지.
이번에는 숫자 하나하나를 셀 때마다 눈을 번쩍뜨고 어둠 속을 잠시 응시하다 순간적으로 다시 감는 방법을 쓴다.
하…눈 뜨고, 나 …눈 감고. 두…눈 뜨고, 울… 눈 감고.
그러기를 벌써 이백사십번.
숫자를 잊어 버리지 않고 계속 세어 나가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오히려 정신이 점점 더 말똥말똥해지는 바람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오늘 밤도 바짝 곤두서 있는 온 몸의 신경을 가라앉히지 못해 잠자리에서 뒤척뒤척 지친 몸을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잠들기 편한 자세를 찾으려 공연한 애를 쓰게된다.
벌써 수 주일째 원하지도 않는 야중 방문을 하루도 거르지 않는 불청객,불면과 대적하게 되어 자야 할 잠은 못 자고 그저 이 생각 저생각들을 쫒아내려 죄없는 머리만 벽에 쥐어박게 된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인 야광 시계를 슬쩍 들여다보니 새벽 1시 38분.
침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나와 거실로 들어간다.
무거운 몸을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는 쏘파 깊숙히 밀어 넣은 채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앉아있는 자리 바로 옆에 펼쳐져 있는 성경 책을 아무 생각없이 들어 올린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친언니가 신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나를 생각한답시고 최근에 발행된 우표를 다닥다닥 붙여 묵직한 성경한권을 국제우편으로 보내왔다.
30세 생일선물이란다.
이제는 조용히 젊음을 마감하며 후회없을 30대를 맞이해야 한다는 각오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차원높은 명상의 시간을 가지며 철저히 준비하길바란다는 축하(?)메세지와 함께.
내참, 이런 걸 생일선물이라고 …….
쏘우파 옆에 놓여있는 자그만한 싸이드 테이블 용 스탠드를 켜고 불의 밝기를 은은한 정도로 조절한다.
나의 고통을 보고 기뻐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당황하게 하시며 내 앞에서 교만을 부리는 자들이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하소서…
우연히 펼쳐진 시편의 페이지를 슬슬 넘기며 눈에 들어오는 문장들만 가볍게 읽기 시작한다.
내 원수들의 세력이 막강하고 이유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나를 비방하고 있습니다.
쏘우퍼에 아예 길게 드러눕고 계속 페이지를 넘긴다.
내 마음이 속에서 뜨거워지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이 답답하고 불이 붙는 것 같아 부르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일으키셔서 내 원수들에게 내가 보복하게 하소서…
갑자기 회사동료인 꺄따리나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라 질겁을 하고 그녀의 얼굴을 떨쳐 버리려 세차게 머리를 흔든다.
주의 원수들이 소란을 피우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우쭐대고 있습니다…
불이 숲을 태우고 화염이 산을 삼켜 버리듯이 주께서 광풍으로 그들을 추격하셔서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
그들이 수치를 당하여 놀라게 하시며 치욕 가운데 패망하게 하소서…
이번에는 화염과 광풍에 화들짝 놀라 이리뛰고 저리뛰며 줄행랑치려는 또 다른 회사 동료인 레티씨아의 모습이 떠올라 킥킥거리며 혼자 웃어본다.
여호와여, 악인들에게서 나를 구하시고 난폭한 자들에게서 나를 보호하소서.
그들이 항상 악한 음모를 꾸미며 매일 말썽을 일으킵니다.
그들의 혀는 뱀의 혀와 같고 그들의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꺄따리나와 레티씨아의 잔인한 미소하며 거만하기 짝이없는 행동들에 거의 매일 상처입고 괴로와하는 스스로가 너무도 바보같고 나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를 둘러싼 내 원수들의 악담이 도로 그들의 머리로 돌아가게 하소서.
그들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협박이 가득하여 그 혀로 남을 해치고 범죄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구하소서!
주께서는 내 원수들의 뺨을 치시며 그들의 이빨을 꺾어놓지 않으셨습니까 ?
한 보잘것없는 양치기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 쓴 노래들이다.
지혜의 왕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
자기보다 엄청난 몸집의 골리앗에 맞써 돌 팔매질 하나로 모두가 두려워하던 적을 단번에 쓰러뜨린 용기의 사나이, 용감한 정신과 굳은 신념하나로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며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당장 무릎부터 꿇어버린 천하무적을 단숨에 무찔러 버린 실천적 행동의 사나이이다.
이상한 일이다.
다윗의 시편을 읽고나니 웬지 온몸에서 불끈 에너지가 솟아 오르는 것만 같다.
누적된 피로도 싹 사라져버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머리가 순식간에 프랑스 남부 루르드 지방의 수정같이 맑은 성수처럼 깨끗해지고 건강한 심장의 세찬 펌프질이 발작적으로 시작되면서 정화된 피가 위로 위로 끝없이 밀어 올려 지는 것이 그대로 느껴진다.
아니나다를까 얼굴이 금새 뜨겁게 화끈거리기 시작한다.
불 붙은 것 같은 얼굴을 바깥공기에 식혀보려 성경책을 덮고 쏘우파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활짝 열어 제낀다.
칠흙같은 밤…
별도 없고 달도 없다.
새벽인데도 시원한 바람 한 줄기 없다.
그저 끈적끈적한 공기가 콧구멍 안팎으로 들락날락 댄다.
무게도 없다는 공기인데 어찌나 무겁게 느껴지는 지 폐까지 운반해내기도 벅차다.
공기가 진짜 무게가 없나 ?
괜시리 궁시렁대며 목을 길게 뺀 채 하늘을 올려다 본다.
먹구름으로 빈틈없이 메어져 있는 시커먼 하늘이 천근만근 무지막지한 구름의 무게를 감당못해 땅을 향해 질질 무겁게 내리앉아 지상위의 모든 사물들을 인정사정없이 짓누르는 것만 같다.
보기만해도 답답해져서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내일은 시원하게 비라도 한바탕 내리려나…
갑자기 무더운 한국의 장마철에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밑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리 꽂히는 장대비가 그리워진다.
파리에서는 그저 비랍시고 프랑스사람들만큼이나 변덕스런 하늘에서 고양이 오줌같은 것이 찔끔찔끔 떨어진다.
우산쓰기가 뭐해 그냥 맞으면 몸이 끈적끈적 해지고 눈가에 화장이 번져 아주 뒷처리가 불쾌해진다.
창문을 그대로 열어둔 채 다시 쏘우파에 몸을 던지듯 풀썩 주저앉으며 시계를 슬쩍보니 벌써 2시 10분전이다.
스탠드의 불을 아예 꺼 버린다.
순간적으로 창밖의 검은 물결이 집안으로 쏟아져 밀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사방이 시커멓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쏘우파에 머리를 쑤셔박고 하품을 하던 내 뒷 덜미를 누군가가 살짝 건드리는 기분나쁜 느낌을 받았다.
아주 잠깐인데 섬찟할 정도로 불쾌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홱하니 뒤로 젖혀 누가있나 확인해본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자세를 똑바로 할려는 찰라, 코 끝을 가볍게 스치는 차가운 바람같은 기운을 느낀다.
소름이 쫙 끼쳐 올랐다.
이게 뭐지 ?
눈을 부릅뜨고 코 앞의 깜깜한 공간을 뚫어져라 노려보나 역시 아무런 기척도 없다.
순간적으로 오슬오슬 냉기가 느껴져 침실로 다시 돌아가려고 앉아있던 쏘우퍼에서 서둘러 몸을일으킨다.
자,,암,,까,,아,,ㄴ.....
갑작스런 괴소리에 공포에 질려버린 나는 입을 벌린채 엉거주춤 일어나려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만다.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정체불명의 저음이 들려온 지척의 허공을 두 눈동자만 잽싸게 움직여 확인해보나 아무것도 분별할 수가 없다.
그저 어둠속 공간에 이런저런 거실가구들의 휘미한 윤곽만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분명히 내 코 앞에 버티고 선 채 나를 막아서고 있다는 느낌을 저버릴수가 없다.
지금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 괴물체는 조금아까 분명히 잠깐 이라는 말을 한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있,,나,,요 ?
고집스런 새벽적막을 가르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되레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온 몸을 쪼그라뜨린채 눈에 보이지 않는 괴물체의 반응을 코를 벌름거리며 조심스레 기다려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