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여자가 아침부터 나를 찾으러 파란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고목나무같이 무던한 그여자의 남편이 파란대문 밖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서있다.
미아를 업은 그여자는 선아와 진아를 하루만 봐달라고 했다.
남편 다리다친것을 보상받으러 간다고 했다.
걱정하지말고 갔다오라고 했다.
옷을 챙겨입고 그여자의 집으로 가보았다.
큰아이 진아는 방안에서 텔레비젼을보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고 둘째인 선아는 마루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그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세상은 참 불공평한듯이 느껴졌다.
어느덧 세상사람들로부터 잊혀진듯한 느낌이 드는 나도 그랬다.
이 섬에선 하루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있어도 시간은 참 잘간다.
방파제에서는 낚시꾼들이 큰고기를 잡으려고 하루종일 낚시대와 씨름을 하고 있고 컴컴한 밤이 되어도 한번 편 낚시대를 접으려 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그 지루한 시간을 무슨생각을 하며 보낼지도 궁금하다.
진아가 화장실에 가고 싶은지 칭얼거리자 소리를 들을수도 없는 선아가 아기용 용변기를 가져다가 진아를 앉히고 볼일을 볼 수있게 해준다.
이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커피 한잔이 그립다.
지금은 1회용 인스턴트를 마시지만 이섬에 들어오기 전까지만해도 향이 진한 원두커피를 기분에따라 내려 마셨었다.
그남자와 같이 마시던 작은폭포의 원두커피가 갑자기 너무 그립다.
그걸 마시자고 뭍으로 나갈수도 없으니 참을수밖에 없다.
할일없이 아이들만 쳐다보고 있으니 이생각 저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남자는 잘살고 있을까?"
"애기도 낳았겠지. 나쁜놈....."
결국은 또 원망이 마음속에 가득 고인다.
언제쯤 이런 내감정에 자유로워질 수 있을런지 의심스럽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자 세딸들의 엄마가 남편과 함께 돌아왔다.
남편의 보상금으로 모처럼의 쇼핑을 한 모양이었다.
묵직해 보이는 상자가 손에 들러 있었다.
내가 인사를 하고 내파란대문으로 건너오려고하자 그여자가 나를 자기집 마루에 붙잡아 앉혔다.
선물이라면서 봉투에 담긴 무언가를 내밀었다.
바닐라향이나는 원두커피 한봉지와 작은 수동원두커피분쇄기 그리고 끊인물을 부어 커피를 내리는 작은 깔때기와 거름종이 한묶음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고맙기도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커피얘기를 한적이 한번도 없었던것 같은데 그여자는 나를 보면서 사주고 싶었던것이 이 원두커피세트라고 했다.
왜그런지는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냥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땐 진한 향의 원두커피 한잔이 그 복잡한 마음을 다스려 준다는 것을 예전에 느낀적이 있어서인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가슴에 안고 파란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남자와 내가 멀어지기 시작한 건 공통의 얘깃거리가 없어지기 시작한 그때부터였다.
직장생활과 학교생활
서로를 조금씩 잊어가기에는 충분한 것 같았다.
꼭 크게 싸우거나 다투지 않아도 서로에 대한 감정이 시들해 지는건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멀어지는듯 했는데
야근을 하던 어느날밤 술이 얼큰하게 취한채 그남자는 내가 일하는 사무실로 찾아왔고
같이 일하던 동료들에게 술취한 채 횡설수설하는 그남자의 모습에 창피했던 나는 그남자에게 화를 내고 그남자는 술기운을 빌어서 였는지 그 사무실에서 횡포를 부렸다.
이것이 헤어진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다음날 술이 깬 그남자에게 화를 내며 관두자고 했는데 그남자도 그러자고 했다.
며칠을 고민끝에 난 자존심도 상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여러가지 이유로 사표를 내고 이섬으로 들어오게 됐다.
머리를 식히고 싶어서라는 이유도 함께 데리고 왔다.
그렇게 인연을 끝냈다.
난 그남자가 날 찾아와 무릎을 꿇고 빌며 매달리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결과는 비참했다.
헤어진지 6개월만에 다른여자와 결혼을 해버렸으니까 말이다.
원두커피가 담긴 비닐을 뜯자 커피의 고소하며 달큰한 향기가 코 끝에 매달렸다.
원두를 한주먹 가득 꺼내 분쇄기에 넣고 천천히 갈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내며
짙은 갈색빛의 원두가 부서져 아래로 떨어진다.
한번 두번 세번을 갈자 고운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그사이 파란대문을 넘지않은 원두커피의 진한 향이 온 집안을 감싸돈다.
휴대용 가스렌지위에 올려논 주전자에서는 물이 끓기 시작했다.
이빨빠진 바람소리가 서너번나자 깔때기를 꽂은 거름종이위에 금방 간 원두커피를 세숟가락 넣고 물을 부었다.
풍선에 바람빠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깔때기에 받쳐놓은 컵에 원두커피가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따뜻한 향기가 목안을 적신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기분인지 모른다.
이 커피 한잔에 이섬과 세딸들의 엄마인 그여자가 좋아지려고 한다.
그날은 원두커피 한잔때문인지 편안한 잠을 잤다.
누우면 천장을 수놓던 그남자의 모습도 보이질 않았고 눈을 감으면 귓가에 들리던 그남자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은 간사하다는것을 느낀다.
아침부터 전화가 난리다.
이렇게 편안한 아침을 깨우다니 그럼에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는다.
머리가 개운하다.
늘 지끈거렸는데..... 이상하다.
전화기를 든채 숨을 한번 내쉬고 말했다.
"여보세요?"
차분한 목소리가 나왔다.
"자다가 받았니?"
밝은 목소리를 가진 여자다.
무슨일일까?
애기 돌이라고 또 전화했나? 싶다.
그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항상 나를 놀라게 한다.
"블랙홀 있쟎아. 얼마전에 결혼한....
어젯밤에 교통사고가 났대. C양이 전화했는데 죽었다나봐 D대학병원에 있다는데 같이 가봐야지?"
그남자가 죽었다고 했다.
아니다 그럴리가 없다.
나를 버리고 갔으면 매 몫까지 오래 잘살아야지
내가 평생 원망도하고 할텐데.....
벌써 죽다니 아닐거다.
오늘이 만우절이었던가?
눈물이 자꾸만 흐른다.
아닐거라고 하는데도 자꾸만 눈물이 턱으로 고인다.
진정해야지
진정해야지
원두커피 한줌을 꺼내 분쇄기를 돌리며 간다.
진한 원두커피향이 온섬을 감싸고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