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되자 어둡고 잔잔하던 파도가 매서워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나를 삼킬듯 덤벼든다.
듬성듬성 연결된 검은 바위위에 곧 쓰러질듯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그 기세에 눌려 흠칫하고는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마침 아무도 없기에 가슴을 매만지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바위들을 몇개 밟고 지나자 방파제가 보이고 하얀 등대 주위로 사람들이 군데 군데 서있다.
들고있는 낚싯대들이 아침햇살에 번뜩인다.
팔자좋은 사람들 같으니라구!
그 모습을 보면 항상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이다.
등대를 뒤로하고 방파제를 걸어나오면 뒷통수가 간질간질하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 하는것같아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추운 날씨이건만 진땀이 머리속에서부터 삐질거리기 시작한다.
이놈의 식은땀
방파제를 나와 10여분을 걸어가면 사람키높이만한 파란대문이 나온다.
파란대문을삐긋이 열고 들어가면 정면으로 누추하지만 아담한 집이 보인다.
낮은 마루가 있고 창호지를 하얗게 발라논 방문 두짝이 나란히 보이고 마루 한쪽끝에는 청자빛이 나는 요강이 자리를 잡고 있고 반대편에는 색바랜 오래된 풍금이 자리를 잡고 있다.
집 오른쪽으로는 장독3개가 반질반질하게 닦여진 채 나란히 놓여져 있다.
그 장독대 끝부분엔 수돗가가 자리하고 있고 커다랗고 빨간 고무통에는 물이가득 받아져 있고 파란바가지가 작은 물살에 이리저리 밀리고 있다.
집 왼쪽으로는 작은 화단이 길게 자리잡고 있고 지금은 동백 한그루만이 꽃을 가득 안고 있다.
언제나 그렇지만 항상 파란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낯설다.
벌써 1년이 다되어가건만 여기가 어딘가 싶다.
마당에 발을 들여 놓으면 한숨에 땅이 꺼질듯 하다.
이런 생활을 1년이나 반복하다니 그럼에도 이다지 낯설고 두려운 느낌이 드는건 또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다.
벌써 1년이다.
세상에 연결된 것들을 모두 정리하고 이 호젓한 섬안의 파란대문으로 들어온것이
그때는 내가 다시 깨끗해지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웠었다.
나를 아는 모든 것들과의 끈을 끊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생각에 파란대문이 천국의 문처럼 여겨졌었다.
커다란 가방에 옷가지 몇벌과 포도송이가 매달린 아끼던 조명등과 볼펜12자루 대학노트 10권 그리고 죽어서도 잊지못할 그남자가 전해줬던 네통의 편지......
세상을 뒤로하고 파란대문안으로 들어섰을때 내 손에 쥐어져 있던 것들이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반면에 빨리 버려야 할 것들이었다.
젊은사람이 그것도 도시생활을 하던 여자가 혼자 외딴곳으로 들어와서 산다는 것이 낯설었던지 이곳의 사람들은 나를 빨리 기억해두려고 애쓰는것 같았다.
방파제에서 바다를 등지고 서면 커다란 산아래 듬성듬성 10여채의 집들이 계단처람 박혀있다. 파란지붕, 기와지붕, 오렌지색지붕....
그사이 내가 1년이나 버틴 오래된 오렌지색 지붕이 보인다.
그 것들을 등지고 서면 한없이 넓고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며 나를 유혹한다.
바닷속에 몸을 맡기면 어디론가 한없이 흘러갈 것만 같다.
누군가 어깨를 툭 친다.
"뭐해. 여기서".
난 흐리멍텅한 눈으로 웃어보였다.
처음 여길 들어왔을때
그 여자는 나를 보며 배실배실 웃었다.
나는 미친여자이겠거니 했다.
낯선 사람을 보며 웃는다는건 미친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전까지만 해도
그여자는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남편과의 사이에 세딸을 둔 엄마였다.
젊은사람이 없어서였는지 나를 처음봤을때 너무 반갑고 즐거웠다고 했다.
친구가 생기겠거니 한 모양이었다.
순박하고 깨끗한 여자였다.
"어. 그냥 바람쐬러"'
나이 차이는 세살정도지만 말은 트기로 했다.
그여자가 그러자고 했기에 난 손해볼것 없으니 그렇게 하자고 했다.
"딸들은 어쩌고 나왔어?"
의미없이 묻는 인사같은 말이다.
그 여자는 그런걸 너무 고마워한다.
"지들끼리 놀아. 금방들어가야지"
그러곤 또 실없는 웃음을 흘린다.
낙천주의자일까 아니면 바보일까
내머리속에서 피어오르는 생각들이란 공장굴뚝에서 내뿜는 시커먼 연기와 다를바 없다.
그여자의 세딸들은 사철나무 같았다.
항상 푸르렀으며 싱그러운 웃음을 가졌다.
그여자의 남편 또한 커다란 고목나무 같았다.
아주 크고 듬직한 고목나무
그아래 아주 편한 웃음을 짓고 앉아있는 그여자와 그여자의 세딸들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여자가 미울정도로 부러울때가 있다.
혼자 파란대문을 열고 들어갈 때 그런 생각들이 나를 외롭게 만든다.
그여자의 세딸들은 하나같이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큰딸이라는 아이는 소아마비로 걷기가 힘들었으며 이름은 진이였다.
둘때딸이라는 아이는 청각장애로 듣지를 못하니 당연히 말도 못했는데 이름은 선이였다.
셋째딸이라는 아이는 왼쪽손이 문제였지만 딸들중 그래도 가장 멀쩡하다고
그여자와 남편은 항상 누군가에게 고마워했다.
손가락이 다섯개가 아닌 세개만 가지고 태어났지만 정말 다행인건 오른손잡이라는 것이었다. 이름은 미아라고 했다.
애들 이름을 진선미라고 지은건 미스코리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했다.
둘땟딸인 선이는 나를 무척이나 잘따른다.
무슨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내가 어딜가려고만하면 언제든지 따라나서겠다고 때를쓴다.
처음엔 너무 당황스럽기도 하고 귀챦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냥 그렇다.
"저녁밥 먹으러 올래? 선이가 아줌마 데리고 오라는데..."
저여자의 하얀웃음이 자꾸 나르 혼란스럽게 한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끔한다.
저여자의 웃음은 나에겐 마약이다.
"어. 그래... 그러자"
혼자사는 여자인 나는 말 많은 동네아줌마들의 입에서 떠날줄 모르는 화젯거리였다.
애를 못낳아서 소박맞았던지.....
남편이 바람이 나서 이혼을 했다던지.....
죽을병에 걸려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을 쳤다던지......등등의 얘깃거리들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제일 기가막히는건
그 죽을병이었다.
동네아줌마들이 말하는 죽을병이란것이 몹쓸병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20세기가 낳은 최악의 질병이라는것 바로 그거였다.
이제는 말하기도 우습다.
1년전 내가 살던곳에서는 여자 혼자산다는건 얘깃거리가 아닌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는데
능력도 있고 자신도 있고 세상을 즐길줄도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여기선 이름대신 혼자사는 여자란 문패가 파란대문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투명한 문패가 아줌마들의 입에의해 반빌반질하게 닦여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