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기대하며 선희 와 꿈꾸어 오던 새로운 세계를 향한 미래였던가?
이젠 영 틀렸구나.
나는 왜 이리 운이 없는 걸까?
여기까지 다 와서 들통 날게 뭐야.
비행기표 값만 해도 선희 의 석 달치 월급인데 이제 다시 한국에
추방되어 가면 뭐라 해야 하나?
정말 갑갑하기만 하였다.
어서 공항 밖으로 나가야 그렇게 원하는 담배도 피울 수 있는데 말이다.
나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할 수없이 낯익은 여승무원이 기다리고 있는 곳
으로 가서
“제가 유 진국인데요.”하고 말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다시 서울에 나가실 비행기표를 놓고 가셨습니다.
한국 비행기에서 내리신 분이라고 저희에게 가져다 주셨어요.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그녀 는 내게 다시는 가지 않을 작정인 한국행 비행기 표를 주고는
따각따각 구두소리를 내면서 되돌아갔다.
밖으로 나오자 나는 먼저 담배를 한대 꺼내 입에 문 뒤
멀리 허공 을 바라보았다.
로스엔젤리스 의 하늘은 내 고향 경포대 앞바다의 연한 남색과 닮았고
드높은 공기는 무척이나 맑고 깔끔하면서도 조용하였다.
그렇게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오월 팔일에 서울의 거리엔 온통
빨간 카네이션으로 가득했었지만, 그날 나는 어머니를 버리고
얼굴도 모르던 ‘조 명순’ 이라는 여자와 서류상의 위장결혼으로
영주권을 받으려고 이곳에서 미국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공항에는 미군과 결혼한 엄마와 엘에이에서 살고 있다던
강릉에서 중학교 다닐 때의 친구인 ‘박 경칠’이가 마중 나와 주었다.
경칠 은 벌써 나이에 이마가 벗겨진데다 둥글고 두꺼운 쌍꺼풀의
큰 눈을 가지고 있었고 ,좀 우왁스러운 얼굴에 머리는 아주 짧은
스포츠형으로 한국에서부터 일찍 결혼한 아내와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고 있었다.
그 의집 은 공항에서 차로 달리면 한 시간 이내 거리인
오렌지카운티에 있는 ‘가든 그로브’ 시에 살고 있었다.
플라워 스트릿 이라고 씌어 있는 팻말을 지나고 공원을 끼고 있는
가운데의 작은 스트릿 에 들어서자 마을길 양옆의 큰 나무들 에는
연 보랏빛 꽃들이 만발하여 봄의 싱그러움과 함께 마치 나를 반겨주듯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 가로수 이름이 ’자 카 란 다’ 라는 꽃나무야.
오월이 되면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먼저 꽃이 피어난 다음
한달 정도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꽃이 진 자리에 초록 이파리가 돋아나는
매우 감각적인 이곳 캘리포니아의 상징적인 나무지.”
하고 경칠 이가 말해주었다.
그 보랏빛으로 물들어있는 꽃나무를 보니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가보았던 창경궁의 벚꽃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 같은 봄이었어.
내게는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지’하고 생각했다.
온 천지가 덮이듯이 약간 길쭉한 ‘자 카란다’ 나무 의 꽃망울은
꼭 아기나팔꽃 같이 생겼고 보라색 꽃잎들은 바람이 불어 올 때마다
한들한들 춤을 추었다.
아까 명순 이의 얼굴이 자꾸만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듯 갈 생각을 안 하고 엉성하게
말끝을 흐렸었다.
“며칠 뒤에 꼭 연락 주셔야 되요. 우리 집은 부에나 팍 이에요.”
하고 내게 전화번호를 일러주었다.
강릉에서 개인택시를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된 것은
장바구니 들고 카바레에 드나들던 어머니가 열한 살 아래 새파란 남자와
줄행랑친 뒤 얻은 가슴이 치밀어 오르는 홧병이 원인이었다.
어린 나이에 열 살이나 많은 아버지에게 시집온 어머니는
삼남매를 낳았지만, 툭 하면 쨍그랑 소리와 함께 유리창의 틈새로 들어오는
추운 칼바람으로 우리들은 오들오들 떨면서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곤 하였다. 동네사람들은 우리 집을 가리켜 ‘예쁜이네’ 라고
불렀는데 ,그건 어머니를 일컫는 말이었다.
외출하기를 즐겨하시던 어머니는 언제나
“아이들 데리고 극장에 갔다가 오겠어요.” 하면 그만이었다.
종일 기다리시던 아버지는‘ 정말이지?’ 하시며 화를 가라앉히시고는,
노란 주전자위의 동그란 뚜껑이 엎어질 때까지 막걸리와
밤새워 벗을 하셨다.
그러나 다음해 봄 어머니는 여동생인 진희 하나만 데리고 집을 나간 뒤
영영 들어오시질 않았다.
그 일 이후로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으러 다니시며 분노와 배신의 술로
세월을 보내시다가, 오십을 얼마 앞둔 칠월의 어느 날
“네 어머니를 만나거든 내 사랑은 저 세상에서도 계속될 것이라고
전해주어라.” 라는 말씀과 함께 내게는 겨우 빗방울만 가릴 수 있는
전세방 하나만 남기시고는 돌아가셨다.
한명의 피붙이인 진일이 형마저 친구들과 패싸움으로 소년원에
들어 간지 일년쯤 되었을 때였다.
열 네 살의 나는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나무 조각에
온 생명을 걸고 있는 표류자보다 더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