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었다. 하늘이 뻥 뚫린 듯 거침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서연은 몸이 나른해지고 착 가라앉아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나미애는 다시 서연을 부르지 않았다.
사무실에서는 계속 출장의뢰가 들어왔지만 서연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양해를 구하고 집에 늘어진 채 지내고 있었다.
몸은 계속 가라앉는 것 같은데 마음은 반대로 붕 떠있는 듯했고
마치 꿈에서 덜 깬 것 같은 몽롱한 기분에 취해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동네 슈퍼에도 가지 않고 하루종일 집안에서만 갇혀 지내다시피 했지만 서연이 집에서 지낸 날짜만큼 집안은 구석구석 먼지가 쌓이고, 빨래감은 철철 넘치고 있었다.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은 아직도 화가 덜 풀린 것 같아 보였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다만 큰딸인 미수에게 엄마를 좀 도우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 일을 더 이상 언급하지도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자신의 그 어떤 말이나 행동도 아내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슬금슬금 서연의 눈치를 보며 침묵하고 있었다.
아빠의 잔소리가 점점 늘어가는데도 큰딸 미수는 아침마다 머리를 감고는 목욕탕 바닥은 물론 제 방바닥에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그대로 둔채 허둥지둥 학교에 가기에 바빴다. 가족들이 몸만 빠져나가고 난 집안은 적막감으로 가득하고, 바지런하게 떠오른 아침 햇살이 어느새 거실을 다 점령하고는 구석구석 숨어있는 뿌연 먼지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서연이 움직일 때마다 다소곳이 가라앉아 있던 먼지가 아우성을 치며 일어났지만 서연의 시선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싱크대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릇이 쌓여갔고, 일조량이 늘어난 탓에 저녁시간이 꽤 흐르고 난 뒤에야 서연은 허둥지둥 설거지를 했다.
서연의 몸과 마음을 이토록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든 것은 바로 서민호라는 남자였다. 서연의 생각속엔 서민호라는 남자 외에는 그 어느것도 들어설 수 없을만큼 서민호가 점령하고 있었다.
서민호와의 짧은 시간은 서연의 평온한 일상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자신을 대하는 서민호의 태도는 단순한 친절 그 이상의 것이 분명 있었다.
자주 마주칠 기회는 없었지만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서연이 하루종일 골똘해있는 이런 생각들이 혼자만의 일방적인 생각이라 할지라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을만큼 절실하고 가슴 뭉클한 감정이었다.
물론 서민호의 풍부한 연기력에 빠졌을 뿐이라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서연은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을 떠올렸고, 그와 나눴던 대화를 하루에도 몇 번씩 되새기곤 했다.
서연이 처음 알바를 시작했을 때 남편이 했던 말이 문득 스치듯 생각났다.
나미애집에 출장탁아를 하게되었다는 말을 들은 남편은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였었고, 유난히 서민호에게 경계심을 드러냈었다. 그런 남편이 도리어 우습게 보였던 서연은 남편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었다.
서민호는 솔직히 서연이 바라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 그를 보게 되었을 때 연예인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는 설레임보다는 편한 느낌으로 그를 대할 수 있었다.
스크린을 통해 볼 때와 달리 친근하고 부담없이 자신을 대하는 서민호의 태도 또한 의외였지만 서민호에게 반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서민호는 보면 볼 수록 더 매력있는 남자로 서연에게 다가왔고, 점점 그의 매력에 압도당했고, 결국 서연은 사랑에 빠지게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