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은 지희에게 우유를 먹이고 등을 토닥거려 트림을 시킨 뒤, 책을 읽어 주었다. 까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쳐다보는 눈길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이층에서 서민호가 내려왔다.
웃통을 벗고 수영팬츠만을 입은 상태였다. 다갈색으로 그을린 널따란 어깨가 단단하게 드러나 야성적인 얼굴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남성적인 매력으로 넘치고 있었다.
-아주머니, 지희랑 수영할건데요. 풀 청소하고 물 받아 놓을게요, 한 이십 분정도 있다가 내려오세요.
-네, 알았어요.
정원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거실 창문에 드리워진 얇은 커튼을 젖히고 잔디위에 놓인 고무풀에 물을 채우는 서민호의 동작을 지켜본 뒤, 지희를 안고 나갔다.
서민호는 지희를 받아 안은 뒤, 풀 안에 앉혔다.
얕은 물위로 여러 가지 색깔의 고무공이 떠다니고 있었고, 지희는 신기한 듯 공을 잡으며 놀았다.
-지희 제가 볼게요, 아주머니는 좀 쉬세요.
서연은 집안으로 들어왔다 햇빛을 받아선지 목이 말랐다.
아이스티를 한 잔 만들어 벌컥 벌컥 들이킨 뒤,
거실에 어질러진 장난감과 책을 정리하고 케이블 티브이를 보기 위해 소파에 앉았지만 온통 신경은 마당에 있는 서민호와 지희에게로 쏠렸다.
커튼을 살짝 들추고 밖을 내다보니 지희는 물장난을 하며 혼자 잘 놀고 있었고, 서민호는 지희 옆에서 하반신을 물에 담근 채 책을 읽고 있었다.
간간히 연필로 밑줄을 긋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서민호에게서 풍겼던 지적인 매력이 바로 평소의 독서습관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문득 그가 읽는 책이 궁금해졌다. 호기심에 이끌려 서연은 티브이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서민호는 연기력도 뛰어났지만 따뜻하고 자상한 아빠로서 손색이 없어보였다. 서연은 마음속으로 나미애의 행복한 얼굴을 그려보았다.
-지희가 물놀이를 좋아하네요.
-녜 녀석이 물을 무척 좋아해요.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서민호는 잠시 읽던 책을 잔디위에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서연은 서민호가 내려놓은 책을 들었다. 절반 정도 읽은 듯 자국이 나있었고, 드문드문 밑줄이 그어져있었다. 제목은 움베르토 에코의 ‘전날의 섬’이었다.
서연이 최근에 읽었던 책이었다. 서민호가 자신이 읽었던 책을 읽는다는 사실이 왜 그리도 놀랍고 신기했는지 모른다.
사실 서연은 움베르토 에코의 팬이었다. ‘장미의이름‘을 비롯해서 ‘푸코의 추’도 이미 읽은 뒤였고, 움베르토 에코의 책은 소설이라기보다는 방대한 백과사전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줄만큼 해박한 지식의 창고였지만 즐겨 읽는 독자층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서민호는 ‘미니시리즈‘ 에 관한 대화를 나눈뒤 전화를 끊었다.
-움베르토 에코 좋아하세요?
서연은 책을 서민호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네. 존경하는 작가예요.
-그랬군요, 저두 좋아하거든요.
-아, 그러세요? 그럼 이 책도 읽으셨겠네요.
-녜 얼마 전에 읽었어요.
-그럼 다른 책들도?
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움베르토 에코에 대해, 그의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서민호가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서연에게 의외였지만 서민호 역시 베이비 시터 아줌마가 자신과 독서취향이 같다는 사실을 알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는 것 같았다.
서민호는 베이비 시터 아줌마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대부분 시청자들이 연예인을 만나게 되면, 사인을 부탁 하던가,아니면 출연중인 드라마에 관한 질문을 하는 게 보통인데, 그녀는 자신을 처음 봤을 때 놀라는 기색도 없었고 연예인을 대한다기보다는 너무도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를 대하듯 했었다. 처음엔 쑥스러워서 그러는 거라 생각도 했지만 자신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그 이후로도 변함이 없었다.
더구나 자신이 출연한 미니시리즈의 시청자가 대부분 삽십 대 주부들이고보면 드라마의 전개가 궁금할 만도 한데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 아주머니를 대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곤 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바빠서 드라마를 볼 시간이 없을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묘한 기분이 되었었다.
민호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아주머니는 미니시리즈 안보세요?
-재밌게 보고 있어요.
-“미로”를 보신다구요?
-녜 왜 그렇게 놀라세요. 요즘 미로 안보는 사람 거의 없어요.
-보셨구나...그럼 혹시 뒷이야기 아세요?
-당연히 모르죠.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해요.
-저 뒷이야기 다 아는데.........
말끝을 흐리며 서민호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제가 물어보면 알려 주실 거예요?
-그럼요.
서연은 고인 침을 꿀꺽 삼킨 뒤. 서민호를 향해 물었다.
-희주와 경준 두 사람 헤어져요?
질문하는 서연의 눈빛이 어느새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음을 민호는 감지했다.
경준은 극중 민호가 맡은 역할로 희주의 첫사랑이었다.
-아주머니는 헤어질 것 같아요, 안 헤어질 것 같아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드라마에 몰입한 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머니는 헤어지길 바라세요, 아니면?
-당연히 헤어지면 안되죠.
-왜요?
-서로 사랑하잖아요.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민호는 그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서연의 눈빛이 맑고 지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서연은 민호의 눈빛이 생각보다 훨씬 깊고 부드럽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한 가지 두 사람이 동시에 감지한 사실은 바로 두 사람의 대화가 너무도 잘 통한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은 대화에 빠져 잠시 동안 지희를 잊고 있었다.
지희의 손에서 미끄러져 나온 공이 물결을 따라 멀어져가자 공을 잡으려던 지희가 공을 놓치면서 물에 넘어졌고, 동시에 두 사람의 손이 지희를 붙잡기위해 물속에서 만났다.
동시에 두 사람은 감전된 듯한 느낌에 빠졌고 당황스러움을 감추기에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