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참..절망적이야...
- 황겸 -
하하하...
이렇게 인형처럼 웃고 있기를 벌써 두시간이 넘었다.
아침부터 요란을 떨던 은정이만 아니라면 벌써 자리를 박차고 돌아갔을텐데..
아니, 그 녀석의 생각을 간파할줄 아는 심리안이 내게 있었다면 이런자리엔 애시당초 나오질 않는건데..
이번만큼은 은정이도 대충 소개팅을 주선한게 아니었다.
" 으흐흐..이번엔 잘 해보도록! 엄청난 신랑감이걸랑...쿡쿡쿡..."
" 그럼 네가 하지, 왜 나한테 양보하는데?"
" 야! 황겸!! 넌 사촌이랑 결혼하냐?"
그랬다...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앞에 앉아계신 저 남자가..은정의 사촌오빠셨던 것이다.
굳이 뜯어보지 않아도 한눈에 들어올법한 외모와 훤칠한 키..상대를 배려하는 매너와 그에 걸맞는 유머..거기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병원의 레지던트 일년차...
옵션이 대단하심에도 불구하고 마음에도 없는 자리에서..그저 은정의 사촌이라기에 되지도 않는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있자니 정말 미치겠다.
째깍째깍..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것인지...으..강은정...얼굴에 쥐나겠다.
" 그럼 은정이랑은 대학 친구?"
" 네? 아~ 네.."
" 은저이랑 많이 친한가봐..은정이가 함부로 굴면 안된다고 엄포를 놓던데.?"
" 하하..그래요.?"
이런 미친..만나면 넌 죽었어.쳇!
" 우리 이거 너무 잘 통하는거 아냐?"
" 그러게요..호호."
" 그럼 우리 이참에 확 사귈까?"
켁! 켁!! 아니...이 사람이..지금 뭐라는거야? 이...이...
" 하..하..저...그게..."
" 하하하..정말 순진하게 얼굴에 다 드러나네..농담한걸 가지고.."
" 아..그렇죠? 하하.."
뭐야..이거..완전 선수잖아..강은정..이게 정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허겁지겁 물 한잔을 마시고 괜스레 무안스러워 카페안을 둘러보던 겸이는 그제서야 너무나도 조용한 분위기를 깨달았다.
왜 이러지?
사람들의 시선을 쫓아가보니 겸이의 뒤 테이블에 웬 남자가 서 있었다.
등을 보이며 서 있는 남자의 앞엔 굉장한 미모의 여자가 웃고 서 있었는데..카페안의 모든 시선은 그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무슨 일일까?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카페안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렇잖아도 지루하던 겸이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그들을 향해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며 집중했다.
" 아잉~ 내가 좀 늦었다고 화 내는 거야?"
"........" 침묵...
" 많이 늦은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화내고 그래? 엉? 아잉~ 그만해라~ 나 무섭잖아~"
으웩~ 난 네가 더 무섭다.
" 정말 나랑 말 안할거야?"
"........." 또 침묵..
와~ 저 남자 정말 화 많이 났나보다. 웬만한 남자들은 저 여자의 애교에 넘어가겠고만..
" 우리 그만 만나자."
헉! 드뎌 사랑싸움이 시작되는구나..
" 아니...뭘 이런일로 헤어지자고 그러는거야? 정말 미안해~ 나오는데 엄마가.."
" 싫증났어. 헤어져."
어랏! 그냥 화가난 정도가 아닌데? 쯧쯧..여자가 안됐네..어디 저런 성격으로...
" 겸아? 왜그래?"
" 네? 아..."
아우씨..잠자코 있으라구요~저쪽이 더 재미있다고요~
" 저..갑자기 머리가 좀 아파서요.."
" 어? 왜그러지? 잠깐 좀 기다릴래? 내가 약국에 다녀올께.."
" 아니..뭐..그럴것까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약을 사러 달려가는 은정의 사촌오빠..미안하지만..장장 두어시간의 지루함을 한순간에 날려줄 이 왕성한 호기심은 그 미안함을 덥고도 남았다.
" 왜 그러는거야? 정말 미안하다잖아."
제법 당찬 목소리로 대꾸하는 여자...그래...약속시간에 좀 늦은게 뭐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
" 널 좋아하지 않아."
" 뭐?"
" 내 심장이 널보고 뛰지 않는다고.."
와~ 강적이다. 대단한 놈..발견!
" 아니, 어떻게 그럴수가.."
" 민선아..네가 날 좋아하는 마음은 잘 아는데..어쩌냐..내 심장은 넌 아니라는데.."
" 어떻게 그럴수가.."
결국 그 곱게 화장한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자..젠장, 여자 울리는 나쁜놈일세.
" 널 위해 뛰어주는 심장을 가진 놈..만나라.."
역시 바람둥이들은 다 말빨이 장난이 아니야..저것봐...마지막까지 멋진척은...
" 안돼! 미안해..내가 잘못했어..맘에 안드는 점이 있으면 내가 고칠께.응??"
하~ 저 놈의 늪이 너무 깊었구나..
" 그걸 기대했으면 헤어지자고 얘기도 안해. 그만 간다."
정말 감당 안되는 실갱이가 몇마디 오가더니 냉정하게도 녀석은 일어나 출입구쪽으로 걸어갔다.
독한놈..내 심장이 어쩌구 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네..
남은 여자는 두 눈에 마스카라가 흘러내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참으로 안된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매달리는 것도 겸이의 스타일은 아니기에 여자가 미련스러워 보였다.
때마침 약을 사러갔던 은정의 사촌오빠가 돌아오고 병원에서 연락이 오기전까지 겸이는 밥먹고, 병원에서의 일상을 묵묵히 들어주는 수고를 더한후에야 오늘의 만남으로 부터 해방될수 있었다.
남은 시간은 서점에나 돌아볼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아까 남자에게 차였던 그 여자가 카페를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진꼴을 당하고선 지금까지 혼자 카페에 앉아있었나 보다.
겸이는 그 쓸쓸한 뒷모습을 보면서 사랑은 참..절망적이란 생각을 했다. 서로에게 충실했던 사랑이든, 한사람만 행복했던 사랑이든..끝나고 나면 남는 그리움과 쓸쓸함은 사람을 바닥으로 떨어뜨린다는 것, 다시 올라오기 힘들게 한다는것..그 안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한다는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을바람이 스산하다.
" 준길아~ 나 오늘 실연당했다."
" 지랄하네. 야 임마! 네가 실연당하고 다닐 놈이냐?"
" 훗. 그런가~"
" 어디야? 벌써 혀가 꼬이는데. 기다려~ 형아가 금방 달려갈테니."
그렇구나..친구란게 이런거구나.
고등학교 내내 부모님께 반항하느라 학교에 잘 나가지도 않았고, 그래서 변변한 친구하나 없었던 공현이었다.
타고난 머리탓인지, 아님..그나마 내신 관리는 잘해온 탓인지 그렇게 소원하시던 의대를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대학으로 들어왔을때도 친구라느니 뭐 그런것들에 대한 기대따위는 없었는데...준길은 먼저 손내밀고 옆에 있어준 친구였다.
학교에 며칠씩 나오지 않아도, 부탁하지 않아도 대출까지 척척 알아서 해주는 세심한 놈..
민선에게 이별을 얘기하고 돌아서는 것에는 별 느낌이 없었으나, 공현도 사람인지라 누군가에게 모진말을 하고 나니 기분이 가라앉는건 어쩔수 없나보다.
술생각과 더불어 준길이 생각난걸 보면..
하지만 정작 자신의 머리를 어지럽히는건 되지도 않는 수영을 배우겠다고 입 앙 다물고 덤벼들던 녀석, 수수한 청바지에 머리 질끈 묶고 다니는 녀석, 새벽마다 커피를 마셔대는 녀석, 남자 만난다고 그간 보여주지도 않던 미니스커트에 애교부리던 녀석..
기억하기도 쉬우리 만큼 몇 되지 않는 녀석의 그림자가 오늘따라 더욱 신경이 쓰인다.
그 남자와 사귀기로 했을까..?
아씨..그게 뭐..어떻다고..그게..뭐...
오늘따라 술이 달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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