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생각이 났지만, 조바심에 걱정도 되었지만,
그리고… 적잖은 노파심이 생겼지만
내 손은 그의 핸드폰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난,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그가 물어본다.
그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여보세요? 선경씨?
따뜻하다.
서로가 기다린다.
하지만 그가, 먼저 용기를 내었다.
-선경씨… 정팀장님한테 전화 받았습니다.
-네…
-제가 지금, 그 곳으로 가겠습니다.
-그러실 수 있으세요?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일을 같이 할 수 있겠어요?>
허공에 아닌, 내 마음의 누군가가 그걸 묻고 있지만
정작 상대방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그럼 이따가 뵙지요…
-네…
전화로 듣는 그의 목소리- 이것이 마지막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 정말 간만이네요? 요새, 왜 그렇게 안 오셨어요? 보고싶었는데~
동만 마담(?)은 나에게 필요이상으로 친절한 거 같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행동이 상술에 의한 행동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다만, 부담스러울 뿐이다.
-네, 안녕하셨지요?
-그럼요~ 이렇게 다시 뵈니까 너무 좋은걸요~
아참, 치즈케익이 바로 나왔는데 좀 드실래요?
-아뇨..저 방금 점심 먹고 와서요~
마담의 안타까운 시선을 애써 미소로 답례했다.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무엇부터 할지 몰라서 가방 안의 소지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방 안의 캔커피가 보였다.
극장가기 전날 그가 내게 준 따뜻했던 캔커피…
이젠 식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어머, 무슨 일 있어요? 선경씨?
마담이 홍차를 들고 나타났다.
-아뇨…
난 또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발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말아주었으면 했다.
-혹시, 강아지 좋아해요?
마담이 내게 묻는다.
-강아지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뇨, 왜요?
-아니, 그냥~
싱겁다.
난 강아지는 키워 본적도 그리고 관심을 가져 본적도 없다.
그냥,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내 관심 밖의 취미라고 생각할 뿐이다.
-아니, 정팀장님은 무척 좋아하시는거 같아서…
-아, 정팀장님이 강아지 많이 좋아하세요?
그녀가 도 고개를 끄덕한다.
난 웃었다.
-그거 몰라도 회사서 일하는데 지장 없거든요…
상사의 취미랑 저랑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녀가 무척 황당스럽다는 식의 표정이다.
아차, 내가 잘못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정팀장 회사 안 나오신 이유, 혹시 아세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단지 개인적인 사정이라고만 들었는데요…
-정팀장, 그러니까 미키아빠가 미키 때문에…
<어머어머 그 사람 노총각이라고 하더니…애가 있네~
화영선배, 무언가 잘 못 알았나 보네…>
-미키가 홍역을 앓아서…
-아, 그래요?
정말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혹시, 이혼남인가? 회사도 결근하고 아이를 돌보는 게…
근데, 그거하고 강아지하고 무슨 상관이야? 설마~ >
-혹시, 미키가 강아지에요?
-선경씨, 몰랐어요?
<어머머…정팀장 분위기가 영~ 딴 판이네…>
-네~ 근데, 강아지가 홍역에 걸렸다고 회사에 출근을 안 해요?
더구나 오늘은 촬영도 있는 날인데…
-어머, 그건 선경씨가 몰라서 그래요~
미키아빠가 얼마나 미키한테 끔찍한데….
-글쎄요~ 전 잘 모르겠어요…그냥 말 그대로 애완견일 뿐인데,
사람들이 너무 호들갑 떠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동만 마담은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내 앞에 서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죠? <그저께 보았는데 무슨 오랜만?>
나도 모르게 내 맘속에선 그를 시니컬하게 대한다.
-설명, 해드려야겠죠?
난 그와 대화를 하면 안된다는 뇌 속의 지령을 받았는지,
사적인듯한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더 이상 나에게 묻지 않았다.
내 맘을 알았나 보다.
마담이 준비하는 동안 나와 그는 아무 말없이 각자의 일에만 몰두했다.
박선배네 촬영갔던 날과 비슷한 분위기다.
가끔 우리(?) 둘을 홀깃 쳐다보는 마담의 시선만이 존재한다.
-전 준비가 다 끝났는데…두 분은 어떠세요?
마담은 우리 둘의 이상한 분위기에 걱정하면서 묻는다.
-네, 저도 괜찮은데 어떠세요, 선경씨는?
-저야모…괜찮아요…
우리들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시작했다.
마담이 준비한 장소로 조용히 따라갔다.
-이것저것 준비해서 좋은 장소에서 촬영해도 되지만
전 그냥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하고 싶었어요…
그녀는 동만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주방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주방은 비교적 큰 편에 속해있었고,
주방장의 성격이 그러한지 무척 깨끗해 보였다.
-그럼 일단 이 곳에서 조리하는 과정을 촬영하고
엔딩 컷은 홀에서 찍도록 하죠?
인표씨의 제안에 서로들 눈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난 그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맘을 들키는 것만 같아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선경씨, 오늘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보이네~
마담의 말에 인표씨가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 이내 곧 성큼성큼 촬영 할 장소를 물색한다.
-아뇨~ 그저께 비를 조금 맞아서 그런가봐요~
나도 모르게 그를 의식한 말들을 하고야 말았다.
-비를? 비를 맞았어요?
그녀가 걱정스런 투로 묻는다.
-아뇨, 걱정하실 만큼은 아니에요~
괜한 말을 한 거 같았다.
그는 아직도 묵묵히 그의 일을 한 뿐이다.
모든 일이 끝났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또 케익을 포장해 주었다.
그에게도 주었지만 그는 애써 사양한다.
<왜, 받아다가 박선배 갔다주면 되잖아요~>
정말, 나란 아이가 왜 이렇게 변한거지…이렇게 조잡할 수가…
그런데 갑자기 그에게 묻고 싶어졌다. 아니, 따지고 싶었다.
그 전날 날 찾아와서는 극장에서 만나자 해 놓고…
그 다음날 날 외면한채, 박선배와 함께 한 연유는 무엇인지…
하지만 결국, 난 그에게 묻지 못했다.
그저…나에게 공손하게 인사하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만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선경씨? 바뻐요?
나의 감상을 그녀가 깬다.
-왜 그러시는데요?
-아니, 그냥 말동무나 할까 싶어서요… 아참, 홍작가 잘 알아요?
-아뇨~
-우리 정팀장하고 홍작가랑 여기 그래도 곧잘 오곤 했는데…
<우리 정팀장? 어머머…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사이야…
정팀장 취향이야? 그럼 이분이…어째, 이 곳으로 하자고 하더니… >
-요새는 뜸하네~
-그래요?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그의 말을 하지 않는다.
딸랑거리는 소리에 입구를 쳐다보았다.
양손에 강냉이를 들고 어떤 여자가 들어왔다.
-언니, 이것 좀 먹어봐요~
라며 강냉이 봉지를 뜯어서 강냉이 한줌을 내게도 건넨다.
-어머머 이것 정말 맛난다~
-그치그치~ 어떤 할아버지가 사라고 가지고 왔는데
너무 맛있어서 내가 열 개나 산 거 있지~
-열 개나?
-응~ 언니 또 먹고 싶으면 말해요~
그녀들은 강냉이 이야기에 흠뻑 빠져있다.
다이어트에 좋다는 둥, 심심할 때 먹음 좋은 군것질이라는 둥,
강원도로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까지…
나도 강냉이를 씹고 있으니 고소했다.
씹을수록 더더욱…
사람들은 실제보다 부풀려 이야기되는 것들을 싫어한다.
하지만 재물이나 먹는거라면 그건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마치 이 강냉이처럼 부풀려질수록 양이 많아지니까~
난 그와 단지 몇 번의 만남을 통해
내 운명과 결부시킬 만큼의 가속도를 더했다.
하지만 내게 돌아오는 건 이런 체념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