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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BY Silvery 2004-04-14

집안은 서둘러서 치운 기색이 역력했다.


승미는 '애들 키우는 집이 다 그렇지' 라는 말로 나의 언짢은 기분을
맞춰주려 했지만, 나는 왠지 그녀가 내심 못마땅했다.

큰 키에 쭉빠진 몸매는 아니지만, 삼십대의 아이 둘 딸린 아줌마라 믿기에는
승미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너.. 무척 많이 변했구나.."

"호호.. 응, 나 전엔 좀 촌스러웠었나?"

좀 자존심이 상할수도 있었을텐데, 승미는 연신 활짝핀 개나리처럼 웃고있었다.

집에있던 아이들 과자에, 커피한잔 마시고 나자 승미는 갑자기 가지고온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놓았다.

나는, 승미의 모습에 좀 당황되었다.

 

"승미야.. 너, 보험하니?"

"으응? 호호.. 아니야. 난 직접판매 라고 하는걸 해"

"직접..판매??"

"응. 니가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흔히들, 방판 이라고 하지."

보통의 사람들이 참 하기 힘들었을 방문판매 한다는 말을 그녀는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쉽게 말했다.

 

"희수야, 너 00라고 들어봤지?"

그로부터 약 한시간 가량 승미에게서 방문판매를 한다는 그 회사의 기본 이론 같은것을 들었다.

사실.. 들었다기 보다는 그런척을 했을 뿐이다.

기억난다면, 밑의 하부조직으로부터 직접 돈을 상납받는것이 없어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다는게 다른 조직과 틀리다는것뿐,

그외의 것은 귀에 잘 들어차지도 않았고, 또 듣고싶지도 않았다..

그런 방문판매나 일명 피라미드라고 하는 회사들의 설명등은 전에도 수없이 다른사람들을 통해서 접해봤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승미의 설명들은 나에게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맞장구를 치는 내 모습에 승미는 조금은 흥분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희수야, 큰애 유치원에서 몇시에 오니?"

"오후 두시반쯤..? 왜??"

"그럼, 우리 내일 미팅 가지 않을래?"

"뭐? 미팅? 호호.. 얘가 뜬금없이 갑자기 미팅은 왜 하재??"

"호호.. 남자들이랑 하는 미팅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이야기 듣는 자리를 미팅이라구 해"

"에이.. 난 둘째가 넘 어리잖니.. 넌 둘째가 벌써 중학생이라며..?"

"내차로 같이 가서, 내가 둘째 봐줄게. 어때? 기분전환할겸 나랑 외출한번 하자~~"

"...생각..좀 해보고.."

"생각하고 자시고 할것도 없어, 얘~ 집에서 매일 있는것도 좀 답답하지 않니? 우리 같이 나가자! 응??"

"그..글쎄.."

승미의 재촉하는 말들은 은연중에 나를 집에만 갇혀있는 새처럼 여기는것 같아 슬그머니 반감이 들기 시작했다.

 

"뭐, 나갈라면 언제든지 나갈수야 있지~~"

"호호호, 거봐! 역시 여고시절 대빵답다니까?? 그럼, 내일 내가 여기 9시까지 올게. 큰애 유치원보내면서 나랑 같이 나가면 된다?"

"응?? 으..응.. 그래. 알았어."

"참, 희수야, 내일 미팅에 꼭 가야해. 간다구 해놓고 안가면 내체면이 좀 그렇거든~ 아뭏튼 약속은 약속이니까.. 알지??"

"알았다니까..!"

점심먹고 가라는 약간은 가식적인 내 말을 승미는 알았을까..

그냥 다른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면서 돌아가 버렸다.

 

직접 판매라든가.. 방문판매라던가.. 하는 것들은 내 인생에서 그리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나는 약간의 보수적인 성격을 가진 남편의 아내였고..

여자가 집 밖의 일을 하고 다니는것에 대한 거의 알레르기 수준의 반응을 보이는 시어른들의 맡며느리였다.

맡며느리인 만큼, 시댁일에 나도 어느정도는 알레르기 수준으로 반응했고,

다른 사람들이 봤을때, 훌륭한 시부모에 훌륭한 맡며느리 처럼 보였다.

시부모때문에, 시누이때문에 고생하는 다른 며느리들이 본다면 배부른 소리였겠지만,

나는 시부모님과 남편의 '여자 내돌리지 않기'에 나도모르게 서서히 지쳐있었다.

 

 

승미가 빠져나간 집..

마치 온돌방에 온돌이 빠져나간듯 좀 허하게 보였다.

 

 

'내일 뭐라고 하고 집을 나가지.. 어머니가 집에 전화라도 하시면, 어디갔었다고 하지..?'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래도 나는 내일 집을 나가서 약속장소인 미팅이란걸 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후훗.. 나도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래. 나도 친구가 있다 이거야.. 나도 만날 사람들이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나도 외출이란걸 해보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