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것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엄마를 묻고 집을 정리하고 지수가 세상을 인식하던 순간부터 함께 했던
함평댁 아줌마를 울며 떠나보내고 방학과 동시에 유치원을 그만두고
지수는 아빠의 본가로 들어갔다
모든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이뤄졌다
어른들은 어쩌면 그렇게 순서데로 척척 일을 해나가는지 어린 지수에게
그것은 참으로 경이롭기까지 했다
어른들은 슬픔도 그렇게 순서가 오면 잊는듯 했다
엄마에게 사랑이던 아빠는, 죽은 엄마를 잊는것조차 그렇게 쉬어보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지수는 아빠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얼어붙고 있었다
태어나서부터 엄마와 함께 살았던 명륜동의 집도 지수에게는 정말 컸었는데
아빠의 집은 그 집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게 큰 부잣집의 막내아들이 친구집 일해주던 아줌마의 딸과 정분이 났으니
그것은 궂이 보지않아도 뻔한 결말일수밖에 없었을 테지...
외할머니의 설움은 또 어땠을까.....
그일이 터진후 일하던 집에서도 쫓겨난 외할머니
혼자서 궃은일 마다않고 고등학교까지 보낸 딸년이 얼토당토 않은 부잣집 도련님과
정분이 나서 도망을 갔으니 어떻게 멀쩡할수 있었을까
외할머니는 혈압으로 운명을 달리하셨고 그것은 평생 엄마에게 지울수 없는
주홍글씨가 되었으리라....
"네가 지수니?"
아빠는 본가에서 형님 식구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조부모는 돌아가신 뒤였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도망가자고 했다던 아빠는 결국 이렇게 제자리를 찾아와
울타리안에서 안주하며 잘 살아가고 있는데 엄마는 왜 삶을 포기하고
사라져 가야만 했었나......
지수는 복받쳐오는 감정에 저도 모르게 '훅' 눈물을 보였다
"이리와봐.."
당황해하는 사람들 틈에서 지수의 손목을 잡아채는 사람이 있었다
검은 밸벳 원피스 차림의 여자였다
엄마보다 많이 어려보이는 여자다
본능적으로 아빠의 아내임을 알수 있었다
순간 움찔..지수가 저항의 몸짓을 해보지만 지수는 아직 7살이었다
여자를 따라서 간곳은 분홍색 벽지에 딸기무늬 침대가 있는 방이었다
여자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자...이지수...이곳이 니방이야...어때?"
그러더니 무릅을 꿇고 지수의 발앞에 앉더니 두손으로 지수의 얼굴을 감싼다
눈이 아직도 웃고있다
"내 두번째 식구가 되준것에 감사해..첫번짼 네 아빠였구 이제 네가 내 두번째
식구야. 너한테도 내가 식구가 되었으면 해"
여름이었다
엄마를 잃고 들어선 낯선 집의 낯선 사람들
모든것을 잃고 서글프게 들어섰던 이 집
'네가 그 말많던 꼬마애니?'하고 말하는것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씩씩하게
탈출시켜주던 이 여자가 지수의 눈속을 찬찬이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우리 이제 식구가 되자고....
따뜻한 손길이었다...차마 뿌리치기에 따뜻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엄마를 배신할수 없다고 지수안의 또다른 지수가 속삭이고 있었다
"나한테 식구는 우리 엄마 하나에요"
7살 어디에서 이런 말이 숨어있다 나왔을까?.....
잠시 지수를 쳐다보던 여자가 일어섰다
한대 맞으면 어떻하나..지수가 두려운 눈빛으로 그 여자를 올려다봤을때
지수는 알수 있었다
아빠의 여자는 따뜻한 사람이란것을...
거울처럼 아픈 눈빛으로, 그밤 엄마가 듣던 샹송가락처럼 슬픈 눈빛으로,
그런 눈빛 두배는 됨직한 사랑스런 눈빛으로 그여자가 지수를 쳐다보고 있었던것이다
엄마를 땅에 묻은지 몇일밖에 안지나간 그 여름밤
낯선집 낯선 침대에 몸을 눕힌 지수가 소리안나게 침대보를 뒤집어쓰고 울었던 이유는
엄마를 떠나보낸 슬픔에서가 아니라 엄마를 잠시 배신한 설레임이 너무나 가슴아파서였음을
.........7살 지수의 어린 가슴이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