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운명이란게 정해져 있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내는거라고도 하지..
83년 그해 여름은 얼마나 지독한 상처를 주었는지...
7살 지수에게 운명은 그렇게 잔인한 칼날을 들이대고 있었다.
"지수야.."
그날 유치원에서는 여름방학을 앞두고 어머니모임이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서 간식으로 준 하드를 빨고있던 중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함평댁이라 불리던 일해주는 아줌마가
사과반 선생님과 함께 서서 지수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자주 아프던 엄마대신 아줌마가 왔나보다 생각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속이 상하고 화가 났었던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로 하드만 빨면서 못본척 딴짓만 하고 있었다
"아이구..이것아...아이구..이 불쌍한것..아..."
급기야 선생님을 밀치고 교실안으로 들어온 아줌마는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드는것도 무시한체 마구 통곡을 하기시작했다
어렴풋한 불안함이 지수를 떨게했다
그 불안함은 아줌마 손에 이끌려 집으로 들어섰을때 정체를 들어내고 있었다
아줌마와 지수, 그리고 엄마, 이렇게 세명이서 덩그라니 살던 그 큰집에 사람들이
아주 여럿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 틈에 아주 가끔 얼굴을 보여주던 아빠가, 조용히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곁에서
몸을 들썩거리며 울고있는것이 보였다
모든것은 거기서 끝이났다
엄마가 자주 아프긴 했지만 몸이 크게 안좋은것은 아니었었다
함평댁 아줌마가 여러번 혼잣말처럼
"에구, 불쌍하신 마님..."
하며 눈물을 훔치는걸 봤었다
그것은 아.주.가.끔 아빠가 다니러왔다 가신뒤였던것같다
엄마는 남들이 소위 말하는 아빠의 첩이었다
남들은 첩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침뱉았을때도 엄마는 아빠를 사랑이라고 했었다
어떤날은 본처집안 사람들이 무더기로 몰려와 살림을 때려부시고 머리채를
잡아채도 엄마는 아빠를 사랑이라고 했었다
아빠가 지수 학교들어가기 전에 호적에 올려야한다며 지수를 내어달라고
큰소리치던 어제, 악으로 버티며 지수만은 안된다고 울며불며 사정하던 엄마는
어제밤 지수를 껴안고 아빠를 사랑이었다고 했었다
언제나 사랑이던 아빠는 지수를 데려가려던 어제 그순간부터 사랑이었던 사람으로
그렇게 바껴있었다
어린 지수에게도 사랑인것과 사랑이었던것의 차이가 슬프게 다가왔던 밤이었다
여름비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고 있었지
번개소리에 놀라 잠이 깼었던가봤다
엄마는 옆에 없었고 화장실이 가고 싶었었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온 지수 눈에 보인것은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의미를
알수없던 샹송소리에 얽혀 흐느적 흐느적 춤을 추던 엄마의 모습이었다
살면서 수없이 머릿속에 되살아나 아프게 하던 슬픈 엄마의 모습이었다
울면서 다시 잠들었었다
깨어보니 언제 비가오고 번개가 쳤었나싶게 말짱해진 날씨와 언제나처럼
환한 미소로 입맞춰주던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아가. 잘 잤어?"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지수는 어제밤 본것이 꿈이었구나 하고 안심했었다
그런데 ......엄마가 지수를 버렸다
유치원 가방을 챙겨주고 배웅을 해주던 엄마는 어디로 갔을까?
"널 위해 엄마가 새벽에 말았어..."
함평댁 아줌마도 시키지 않고, 소풍갈것도 아니었는데 직접 새벽일찍 싼 김밥을
입에 넣어주며 환하게 웃어주던 엄마는 어디로 갔을까?
"지수야. 엄마는 사랑을 하긴 했는데 최선을 다하진 못한거 같아....
아빠가 너와 함께 떠나자고 했는데 ..엄마는 그럴수 없었어....
엄마가 아빠랑 너랑 꼭꼭 숨는다고 해도 그사람들은 우릴 찾아낼테니...
차라리 이렇게라도 가끔 한번씩 아빠를 볼수 있다면 ....
엄마는 그냥 욕심부리지 않으려는데......
근데 엄마가 잘하는건지 자신이 없다...
끝까지 싸워보고 가보고 그런후에 포기해도 되지 않을까?....
넌,,,다음에 사랑이란걸 하게 되면 ...꼭 ...이만큼이면 됬다고...스스로
만족할만큼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될때까지 버텨보렴"
아...........어린 나를 두고 엄마는 왜 그렇게 주저리 주저리 한을 풀어두고
간것일까......이렇게 버리고 갈거라면 그렇게 많은 세월 안아주지 말것이지...
그렇게 많은 말들 쏟아붓지 말것이지.....그렇게 많은 모습 각인시키지 말것이지...
아빠는...저렇게 많은 눈물을 흘릴만큼 엄마를 사랑하긴 했던걸까?
지수의 기억속에 아빠는 엄마앞에서 한번도 웃어주지 않았었다
엄마에게 사랑이던 아빠는, 사랑해서 도망가자 설득했던 여자앞에서
그 흔한 미소조차 지어주지 않았었다
미소는 커녕 어제 아빠는 지수만은 결코 내줄수 없다는 엄마를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굳어진 얼굴로 "잘 생각해보고 전화해" 한마디 남기고 떠났었다
이제는 사랑이 아니라던 아빠를, 차마 사랑이 아니라고 버릴수 없던 엄마는
지수를 위해 보내라던 아빠에게, 지수만은 안된다고 오열했던 엄마는.......
엄마는.....알고 있었던거 아닐까.....
이미 사랑은 끝이 나 있었음을.....
지수를 내어주어야 하는 날이 가까워졌음을..
사랑을 버리지 못해, 지수를 보내지 못해...엄마는 스스로를 버릴수밖에 없었던건
아니었을까...........
그렇다해도...이렇게 모든것을 한순간에 끝내버린 엄마를 지수는 절.대.로
절대로 용서할수 없었다
온몸을 들썩거리며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아빠 역시 지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리라...입술을 앙달물며 맹세했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울수 없었던 지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를 봤다
파리해진 입술을 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던 그 길다란 속눈썹만 드리운체
엄마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손한번만 잡아보고 싶어서 지수는 살며시 손을 들어 향했다
현기증이 난것은 지수의 손이 엄마의 손을 스치던 그 순간이었다
"지수야...지수야..."
지수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끊기고 있었다
한손에 술잔을 들고 샹송리듬에 맞춰 흐느적 춤을 추던 엄마가
지수에게 웃음짓다가 눈물짓다가....흐려지고 있었다
엄마가 떠나가고 있구나....실신을 하면서도 지수는 가슴이 아파왔다
가슴속에 눈물이 연못이 됬다가, 개울이 됬다가, 바다가 되어서 지수를 뒤엎었다
그해 여름.....7월이 끝나가던...그해여름 ....7살 지수는 그렇게 모든것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