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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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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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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유 2004-09-07

시계바늘이 8시를 막 넘어 서고 있었다. 저녁을 먹지 않아서인지 뱃속 밥벌레 들이 뭔가를 넣어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퇴근하고 들어와서 계속 책상에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뻣뻣해져 있었다.눈도 뻑뻑하고.....분명 영인이 일것이다. 요즘 계속 만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번쯤 집으로 이렇게 쳐들어 올것 같았다.벨 대신 늘 문을 두르리는 영인이 문 뒤에 서 있었다.내가 좋아하는 일식집의 초밥을 들고서......빨강의 장미는 웬일...?의아해 하는 날 보며 영인이 곱게 눈을 흘겼다.

 

"선물 받은거야.....네게 아니란 말이지.....눈보신만 해....나중에 내가 가져갈 거니까..."

"누가 준 선물인데.....?혹 사장님..?"

"야 !너 내가 사장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그랬지...?사석에선 그냥 상민씨라고 부르라고 몇번을 말했어?엉!사장님 그러면 내가 마치 늙다리 꼰대랑 연애하는 것 같아 싫다고 했잖아......경고야...또 한번 그러면 ....각오해 네게 미치는 벌이 얼마나 큰지..."

 

눈을 흘기며 그렇게 말하는 영인일 보며 난 큭큭 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늘같은 회사의 젤 높은 분을 말단 사원이 어떻게 이름을 막부르냐......절대 안되는 일이지.....영인인 내가 사장님이라고 부를때 마다 매번 눈을 흘기지만 난 쉽게 나오지 않았다. 사석에서 몇번 마주한적이 있지만.......영인이 흘김에 매번 존칭은 얼버무리거나 생략을 하고 대했다. 영인이 성화에 박상민 사장님도 내게 그냥 이름 부르기 뭐하면 영인이 처럼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그또한 쉽지 않았다.목에 뭔가 턱 하니 걸려 있는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못말리는 결백증 증상 같은 예민성 신경성 이 문제라며 영인이 늘 꼬집지만 이렇게 타고난 성격인데 어쩔수 없지 감수하며 날 만나야 하는게 오영인의 운명이라며 영인이 장난스럽게 한숨을 쉬었지만 사실 나도 가끔은 이런 내가 지겹기는 했다.그냥 남들은 우스면서 쉽게쉽게 넘기는 일도 꼭 한번 딴지를 걸고 마는 비틀린 성격.......문제는 문제 였다.

 

초밥을 먹고 영인이 가져온 녹차를 마셨다.티백은 맛이 너무 옅고 떫어 싫다는 영인인 늘 일본에서 들여온 잎차를 마셨다.가끔 내게도 이렇게 한병씩 가져다 주었다. 녹차와 애플맛 홍차....사실 홍차는 별로지만 몸에 좋으니까 꼬박 꼬박 마시라는 영인이 말에 가끔 생각날 때마다 마시긴 하지만 고상한 입맛이 아닌 내겐 별로 맞지 않는것 같아 거의 제 몫을 못하고 있었다.녹차는 마실만 하지만.......난 그래도 커피가 좋다. 것도 인스턴트 커피......영인인 못마땅해 하지만.......녹차를 한모금 마시며 영인이 일어나서 책상 쪽으로 갔다.

 

요즘 그리고 있는 유.초등 남자애들을 겨냥한 침실소품을 디자인 한것을 훝어 보고 있었다.

 

"남자애들은 여자애들과 달리 파충류 종류를 좋아하는것 같아........공룡이나 악어 뱀.....그딴게 왜 좋나 몰라......"

"재미있잖아........"

"너 요즘 매일 칼 퇴근 한다며.....?너네 부서에서 네가 제일 먼저 나간다고 하던데......집으로 바로 직행해서 이러고 있는거야....?"

"그렇지 뭐.....늦게 시작했는데 남들 하듯이 할 순 없잖아......?사실 벌써 한달이 다 되어 가는데 난 이렇다할 물건 하나 건지지도 못했어......은근히 자존심 상하고 기분 안좋아......저번주에도 한유미 씨가 된 씨앗 시리즈 올라 갔잖아.......실력은 있는것 같아...."

"너도 꽤 한다고 하던데........암튼 너 너무 무리 하는거 아냐....?밥도 제대로 안먹고 잠도 제대로 안자지......?눈밑에 기미 낀것 같아.......이젠 27살 노처녀 대열에 들어 섰는데......피부 미용에도 신경좀 쓰시지......"

".....그럴 여유가 없어......사실 나  한동안 미칠것 같았어....."

"왜....?무슨일 있어.....?"

쿠션을 가슴에 안으며 영인이 침대에 걸터 앉았다. 녹차 잔을 치우고 영인이 옆에 앉았다.말끔한 얼굴로 날 보는 영인일 보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한며칠 정말 힘들었다. 갑자기 시작한 일에 대한 부담이 생각보다 꽤 컸다.다른 동료들은 늘 하던일 하던 사람마냥 자연스럽게 자기 일을 하고 있는데 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지상태 였다.뭐부터 시작해야 할지......어떻게 해야 할지......주중 조회시간이나 부서회의때 늘 꿀먹은 벙어리 모양 다른 팀원들이 하는 말만 경청하고.......가시방석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팀장인 상준이 가끔 내게 의견 없냐고물어올때면 정말 딱 죽고 싶은 생각 뿐이였다.너무 쉬었던 머리에 녹만 잔뜩 들었는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나서는 회의실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다른 팀원들이 날 대놓고 무시하거나 비아냥 거리지 않은데 혼자 그런 자책감이 들어 정말 힘이 들었다. 뭔가 하나라도 해내야 되지 않을까 하는 강박관념......경력자로 본사 발령 받아 왔는데 늘 신입처럼 아무것도 못하고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해 허우둥 하는 모습이 너무 챙피했고 화가났고.....비참했다.가끔 날 보는 상준이와 성주의 시선.......부담이 되었다. 요번에 내게 주어진 소품 디자인에 난 전력전심을 하기로 맘 먹었다. 하나라도 제대로 된걸 건져야만 했다.그래야 내가 여기에 남을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사에 있을 때 처럼 그저 시간만 떼워도 월급이 나오니까.....그런 생각은 버려야 했다.하는일 없이 돈만 받아 가는 무책임한 인간에 대해서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늘 힘들었다.바빴고.......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는 생각......조급함이 날 지치게 하는 요즘 이였다.

 

"너 상준이 하고 따로 만난적 있어....?"

영인이 물었다.

"바쁘잖아......상준이도 계속 야근하는 것 같던데.......우리팀 쉴틈이 없어......."

"........귀국 축하 파티도 안해주었단 말이지........?전에 내가 보낸 문자 메세지 봤어...?"

"언제......난 핸폰 확인 잘 안하잖아....."

"........벌써 보름전이네.......우리 동창들 모여서 성주하고 상준이 귀국 축하 파티 해줬거든.....너 내가 문자 3번이나 보냈는데 끝내 오지 않더라........말은 안했어도 상준이 꽤 실망한것 같았어......."

"......"

".........상준이가 따로 만나자는 말 안해...?"

"......응...."

".......그랬구나.....둘이 정말 대단들 하다......아무리 5년 만이라고 해도......그렇게 죽고 못살만큼 좋아 했으면서.......만나자는 연락한번 안해...?웃기는 녀석이네 박상준....."

 

자조적으로 말하는 영인일 보며 괜히 입안이 썼다.그랬다. 정말 상준인 내게 한번도 사적인 눈빛이나 말한마디가 없었다. 그날 첫 대면후로 아직 말한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했다. 집에 들어오면 핸폰의 전원를 꺼버리는 나 였는데 상준일 만난후로는 24시간 내내 핸폰을 켜놓고있지만.......상준이 에게선 한통의 연락이 없었다. 회사에서 마주치는게 다 였다. 회사에서도 상준인 거의 자리 보존 하고 있질 않았다. 늘 외근이며 출장으로 바빴다.뭐가 그렇게 바쁜지 어쩔땐 한번 나가면 그날로 퇴근이였다.얼굴보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은 섭섭하고 조금은 슬펐다. 상준이에게 난 이미 잊혀진 사람 같았다.그래서 슬펐다.

 

 

아침이였다. 비가 와서 인지 커피가 마시고 싶어 잠시 밖으로 나왔다. 커피 자판기 앞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두세명 더 있었다. 괜히 미소가 나왔다.다들 비 하면 커피인가 보다. 조건반사 법칙이 딱 맞게 적용되나 보다. 세찬 비가 아닌 오는듯 마는듯 내리는 가느다란 빗줄기.......피아노 선율에 감성을 맡기고 마시는 커피......향조차 얼마나 감미로운지.....

 

"이여경씨......커피 들릴까요...?"

 

자재과의 김영석 이였다. 나완 동기 였다.나인 나보다 3살 더 많은.......예전에 신입사원 연수때 같은 조 였던 남자 였다. 여기와서 만나서 정말 반가왔다.가끔 이렇게 복도나 계단.....식당에서 마주치면 내게 친근한 눈인사를 건네는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 였다.

 

"어제 야근 했더니 몸이 너무 찌부둥 하네요.......자 커피...."

"고맙습니다....매번......언제 한번 제가 살 기회도 주세요...."

"....커피 말고 밥한번 사요......우리 만나서 저녁한번 같이 먹은적 없는데......여경씨가 안되면 내가 사던가......그렇게 해요..."

"좋아요.....언제 좋은지 정하면 알려 주세요..."

 

 

"아침 회의 있는데 안들어 갑니까...?"

 

갑자기 였다. 뒤에서 들리는 날선 소리......... 서류철를 한손에 들고 날 내려다 보는 사람......남자 두명이였다. 한성주와 박상준......말한 사람은 한성주 였는데.....날이선 듯한 시선으로 날 보는 사람은 상준이였다. 금방 김영석의 고개가 숙여 졌다. 데면데면한 얼굴로 날 보더니 이내 먼저 사무실로 사라졌다. 이른 아침이라고 생각했는데.....벌써 9시가 되었던 건가...?

갑자기 당한 일이라 너무 놀랍고 무안했다.들고있는 커피의 온기가 싹 사라진듯 했다. 분명 온기가 있었던 커피였는데......얼을이라도 든듯.....찬기운이 온몸으로 퍼져 갔다.

 

"이번 시즌 컨셉 마무리 다 되었으면 가지고 회의실로 들어와요.....좀 봅시다."
사무적인 말투를 끝으로 상준인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날 힐끔 보던 성주도 별다른 말없이 상준일 따라 들어갔다. 손끝이 아파 왔다. 절반도 마시지 않은 커피가 들어있는 종이컵을 휴지통에 버리며 손끝을 마주 잡았다. 온몸에 찬 물기 어렸다. 괜히 잘못한 일도 없는데 추궁을 당한것 같은 기분.......변명할 여지나 시간도 주지않고 몰매를 맞은 듯한 기분.......자꾸 땅으로 꺼지려는 몸에 힘을 줬다. 한발한발 위험하게 휘청 거릴것 같아 발목에 힘을 줬다. 날 보는 상준이의 눈에 서린 찬 바람이 내 안으로 빠르게 들어와 내 안의 더운기를 모조리 몰아 내버린것 같아. 북풍 한설 같은 그 시선......목소리......눈물이 날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