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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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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꽃을 보다.


BY 주 일 향 2004-01-28

 

바람이 분다. 도발적인 바람에 커튼이 흔들린다. 어느새 따뜻한 차 한 잔이 그리운 계절이 되었다.

며칠째 속이 거북하고 소화가 안되는걸보니 반갑지 않은 명절 증후군이 한 발 앞서 찾아온 모양이다. 평소 드라이브를 즐기는 미연의 사전에 멀미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었는데, 이상하게 시댁에 가는 차안에서는 꼭 멀미가 났다. 특별히 시집살이를 하는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걸 보면 여자에게 시집은 편한 곳은 아닌가보다.

 

평소 두 시간 정도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를 꼬박 여섯 시간을 소모한 뒤에 도착한 시댁. 때마침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단지를 돌고있던 조카가 약간 쑥쓰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맞아 주었다. 조카녀석은 그사이 키가 훌쩍 자라 있었다.

초인종 소리에 일어난듯 형님은 부시시한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문을 열어 주었다.

시어머니는 공터에 일궈놓은 채소를 돌보느라 바쁘다며 부재중이었고. 넓은 집안에 벤 고소한 기름냄새가 명절임을 실감나게 했다.

형님은 나물이며 갖가지 전을 부쳐 놓고 잠시 쉬고 있었노라고 말하며 연신 하품을 해댔다. 어머니방에 짐을 풀고 간편한 옷으로 갈아 입은 미연은 단촐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정담을 나누고 형님을 도와 저녁상을 차렸다.

삼형제가 모인 거실은 모처럼 그득한 정이 오갔고, 푸짐한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찌기 시어머니는 이방 저방을 기웃거리며 식구들의 잠을 깨우고 다녔다.

잠자리가 바뀐탓에 늦게서야 잠이 들었던 미연은 몸이 무거웠다. 그러나 애써 잠을 쫓으며 주방에 가니 전기밥솥에 쌀을 안치는 형님의 얼굴에도 아직 잠이 묻어 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시어머니와 삼형제는 성묘길에 나섰고, 아이들과 집안에 남은 미연은 설거지를 끝내고 집안을 대충 정돈하고나서 형님과 함께 산책길에 나섰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자 잘 보존된 고가 한채가 눈에 띄었다. 호기심에 안을 들여다 보니 마침 명절을 지내러 내려온 듯 보이는 남매가 마당에 고인 물을 가지고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마당 한켠엔 작은 연못도 있었다. 토란줄기처럼 물위로 솟아 자라난 연줄기와 군데군데 연꽃이 피어있었다. 문득 어렸을 때 판소리로 들었던 장화홍련전이 떠올랐다. 한맺힌 자매의 슬픈 이야기를 몇번씩 반복해서 들었던 것 같다.

그 이야기에 연못이 등장해서였을까. 그때부터 연못 가까이 가면 혼탁한 물속이 왠지 무서웠고, 연못 깊숙이 뭔가가 숨어 있을 것 같아 연못을 들여다보기가 겁이 나곤 했다.

그러나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한 연꽃은 애달픈 사연을 담고 있는 듯 애잔함과 처연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 형님. 연꽃이 참 예뻐요.”

“ 저건 연꽃이 아니라 수련이라고 해.”

“ 수련과 연꽃이 달라요?”

“ 그럼.”

“ 형님은 연꽃에 대해 많이 아시네요.”

“ 연꽃을 보며 자랐으니까.......”

말끝을 흐리는 경옥의 마음에 어느새 연꽃같은 그리움이 아련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