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857

하나의 아파트


BY 캐슬 2004-01-20

지난 가을 시집간 여동생 하나의 집들이 날이다.

집들이 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시댁에서 시집살이 하던 하나가 시집살이가 힘겨워 탈출하는거다.

층층시하라고 하나 그런걸.

하나는 시할머님 내외분과 시아버님 부부와 아래로는 시동생 둘과 시누이가 하나씩 있는 요즘 보기 드문 대가족인 남자에게로 시집을 갔다.

연애를 했으니 조건을 맞추고 가는 중매 결혼과는 사뭇 조건들이 불리하다.

결혼을 하고도 직장을 나가면서 맞벌이를 한다.

내가 보기엔 돈보다도 낮시간 동안이나마 숨막히는 '시댁' 이라는 울타리를 벗어 나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시할머니 시어머니가 계시니 하나 한사람 낯시간을 비운다 해도 아무런 문제는 없을 듯 하다.

낯시간을 이용하는게 경제적으로 훨씬 더 효율적이라면 그렇게 하는게 옳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점심시간이면 곧잘 어머니를 (하나의 친정 엄마 즉 우리 엄마)만나고는 한다고 들었다.

막내로 자라고 응석받이 였으니 어찌 하루 이틀에 엄마 정을 뗄수 있을까? 가끔씩 시집살이가 힘들것도 같은데 용캐도 하나는 잘하고 있는 듯 했다.

드디어 분가를 한다니 당연히 축하해주러 가야겠지?

 

 퇴근은 여동생네 집으로 한다.

거기서 나는 가족들과 만나는 것이다.

가족이라야 아버지 내외와 잘난 내 남동생  영민이 내외가 전부이겠지만 말이다.

마누라가 일러준 미림 아파트는 찾기가 아주 쉬웠다.

지하철에서 내려 5분도 채 안돼는 위치의 아파트는 교통은 100점을 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듯 싶다.

초인종을 누르니 문을 열어주는 이는 사돈어른이시다.

덮석 내손을 잡아 주시는 사돈어른의 손이 따뜻하다.

이 손의 느낌은 오래전 잊어버린 어머니 손의 느낌이다.

사돈어른의 뒤에서 마지못해 웃으며

"어서 오렴."

어머니는 나를 보자 무표정한 얼굴이 된다.

마누라에게' 제사를 버린다'고 협박아닌 협박을 하고 아버지와 내가 맞서게 만들어 제사를 우리에게 버리기로 한후 나를 처음 보는 것이다.

이내 저녁 상이 차려져 나오고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간다.

얘기 도중 사돈어른이 한마디 하신다.

"우리 형편으로는 엄두도 못낼건데 이렇게 아파트를 장만해 주시니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헉! 나는 내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순간 내게로 쏠리는 아버지의 당황해 하는 눈빛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저녁상이 물려지고 나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빨리 일어섰다.

내가 술을 한 잔 했기에 마누라가 운전대를 잡았다.

집에 도착하도록 마누라는 아무 말이 없다.

나는 마누라의 눈치를 보는데...마누라는 내 눈치를 보는 듯 하다.

잠자리에 누울려는 순간

"당신 줏어온 자식이지? 당신 친아들 맞어. 어쩜 그럴 수 있냐?. 딸도 아파트를 사주면서 그래도 명색이 맏아들인데...어쩜 그럴 수 있냐구?. 부자집이라고 시집 왔더니 150만원에 3만원짜리 월세방하나 달랑 얻어주고, 20년 동안 고생고생 다해서 장만한 아파트도 뺏어가고."

훌쩍이는 마누라의 어깻죽지를 보자니 화가 치민다.

"가라. 가! 나같은 놈 보다 좋은 놈 있으면 가라 내 안잡는다. 가래이."

그날 밤 마누라는 오래도록 눈자위가 퉁퉁 붓도록 소리죽여 흐느껴 울었다.

그래도 내일 아침이면 마누라는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아침를 맞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녀는 그렇 것이다.

 

 내 아버지 오민식.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째어째 경찰 공무원이 되고, 그래도 말단 경찰이 아니 서장으로 퇴직을 했다.

자세한 연유는 내 알수 없으나 퇴직 후인지 재직중이었는지 부동산 투기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부족한거 없이 내가 자랐을 걸로 알것이지만 나는 고학생이나 다름없는 학생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구두쇠스러움은 아버지 어린시절 가난이 원인인듯하다.

오로지 돈만을 위해서 달려온 아버지의 삶을 내가 따라가기엔 너무 많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예를 들어 난 며칠을 굶겨 놓아도 신수가 훤한 꼴이라서 남들은 나의 이런 속사정을 모른다.

어려서부터 영민이 놈은 하는 일마다 운이 좋았고 같이 장난을 치고 사고를 쳐도 늘 나만 걸리고 잘한 일은 늘 영민이 놈 몫으로 아버지에게 보여지곤 했다.

장가가는 일만 해도 그렇다.

별로 잘난 것도 없는 영민이 놈을 능력있고 앞날이 촉망되는 젊은이로 만들어 마담뚜들의 장부에 올려 놓은 것도 우리 엄마다.

수도 없이 선을 보고 난리를 피더니 그 놈이 장가를 갔다.

있는 척하고 했으니 당연히 25평 아파트까지 갗춘 신혼살림을 시작한건 당연한것 아니겠는가?

그때 영민의 집들이를 갔다 왔을때도 마누라는 오늘처럼 슬피 울었다.

마누라의 친정 그러니까 내 처갓집은 마누라를 시집 보낸후 우리 아버지와의 관계가 사실상 끝난거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딸이 겪는 고초를 보고서 '속은 결혼'이라는 말을 딸에게 여러 번 하셨다.

장인 어른의 말이 맞다.

마누라도 장인어른도 우리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속았다.

나는 그 사실을 부인할수 없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속았고 지금도 속고 있기 때문이다.

나뭇꾼이 선녀의 옷을 감추어 선녀가 아이를 낳고  나뭇꾼과 산다.

선녀는 아이때문에 옷을 주어도 하는 나라로 날아 올라가지를 못한다.

그게 내 마누라인듯하다.

불쌍한 내 마누라. 하지만 마누라에게 나는 싸구려 동정은 하지 않을 참이다.

"개구리가 왜 뒤로 물러섰다가 뛰어 오르는지 알어"

나는 마누라에게 가끔 이런 우문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것도 모를까봐"

마누라는 현답을 할것 같아 나는 미리 대답을 막는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