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다. 사실 모든 것이 그랬다. 우리를 옭아 맨 그 모든 것들을 인연이라 이름하며 매달렸다. 그러나 난 안다. 인연은 없다. 다만 거기에는 늘겨붙은 솥단지의 찌든 때같은 게으름과 유리처럼 투명하지 못한 영혼의 혼탁과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어린 손갈퀴로 앙 움켜잡고 떼쓰던 유아기적 무책임이 있을뿐이다. 칡덩쿨처럼 칭칭 동여매여 더 이상 벗어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감히 누가 당당히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첫발을 그렇게 떼어놓았다. 도망가고 싶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회피하였던게다. 그렇게 내달려 달아나면 그 숨막히는 생속에서 정말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게다. 생은 결코 그리 호락호락한 대상이 아니란 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아마 나의 삶에 섣불리 누군가를 불러 들이진 않았을텐데. 나는 너무 멀리 계단에서 뛰어내렸던거다... .
인연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어떤 계획도 준비도 없이 대학 을 졸업했다. 막연하게 어떻게 되겠지... 안일한 생각은 졸업과 동시에 불안으로 변했다. 그나마 집안 형편이 좋았던 아이들은 결혼이란 것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였다. 오랜 시간 친구처럼 또 애인처럼 지냈던 남자친구는 군대를 갔고 그녀는 맘붙일곳 없이 도시를 떠 돌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막 군복을 벗고 다시 학교에 복학한지 얼마되지 않은 3학년 학생이었다. 후줄근한 청바지와 잠바차림의 그는 유난스레 껑충 키만 커 보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종교써클을 통하여 알아왔던 남자선배를 오랫만에 만나는 자리에 남편은 불청객으로 나와 있었다. 그녀 또한 둘도없이 친한 친구를 대동한 채 나간 자리였기에 어쨌든 그들은 쉽게 분위기에 휩쓸려 밤늦도록 대학가의 선술집에서 웃고 떠들었다. 남편은 그 동안 여자가 알아왔던 남자들과 달리 많이 낯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첫만남이 있은 며칠 후 남편은 전화를 걸어왔다. 빚을 갚겠노라고, 지난 번에 너무 신세를 진것 같으니 다시 한 번 만나자고 하였다. 별다른 일없이 놀고 있던 여자는 선뜻 그의 만남에 응했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었다. 두 번째 만났던 그 날 남편은 첫사랑에 대한 고백을 했다. 남편의 첫사랑을 여자는 아무 느낌없이 들어 넘겼다.그 여자때문에 죽을려고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릴려고 시도까지 했다던 남편의 첫여자. 남자가 떠나보내지 못해 안달했던 건 여자가 아니라 남편의 고집이었던 걸 그 때는 알지 못했다. 그 고집이 어처구니 없는 고집이 여자를 벼랑끝으로 몰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왜 그 때는 하지 못했을까.
D시에서의 하루는 고단하고 단조로웠다. 단조로운 일상속에서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들 속을 자멱질하며 여자는 기진한 숨을 간신히 내 쉬었다. 아이들은 여자의 유일한 바다였고 생명을 이어주는 산소였다. 뭍으로 밀려와 찰랑이며 몸을 기대는 물처럼 아이들은 건조한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면 여자는 살고 싶다는 욕망에 몸을 떨었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거라고 꺼져가는 등잔에 심지를 돋우었다. 그랬다. 여자의 엄마도 또 그 여자의 엄마도 그랬다. 너희들 때문에 내가 사는거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