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따르릉"
찬성은 전화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띠~~~~~~~~~~~~"
또 착각했다. 알람소리인것을.
그래도 오늘은 양호하다.
전화수화기와 함께 침대에서 떨어지는 날이 태반이니...
찬성은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 때 쓰는 아이처럼 울어대는 알람을 눌러 잠재우고 거울을 쳐다봤다. 꺼칠한 얼굴의 낯선 사내가 한명 서있다.
어제 찬성은 사랑했던 그녀와 헤어졌다.
아니, 떠나 보냈다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어제의 일인데, '사.랑.했.던 그.녀' 라니.
헤어졌다는 표현은 서로 사랑했던 연인들에게나 허용되는 단어라고 친구 영수가 그랬다.
"너같이 일방적으로 혼자 좋아했다가 그만두는건 '헤어진다'라고 하는게 아니라 '떠나보낸다'라고 해야지. 그러니까 빨리 작업 들어가라니까. 그냥 놓쳐 버렸쟎어."
그말이 찬성에겐 가슴에 비수같이 꽂혀 어제 더 술을 퍼 먹었는지도 모른다.
5년동안 짝사랑했던 그녀.
속 눈썹이 무척이나 길었던 그녀.
그녀는 찬성 회사의 입사동기였다.
입사때 홍일점이었던 그녀는 머리도 좋고 얼굴도 이뻐서 뭇 남자직원들의 작업대상이 되었다. 찬성도 그중 하나였지만, 말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끙끙 앓았었다.
그녀가 커피자판기앞에만 서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남자직원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뭐 드실꺼냐면서 알랑 거렸다. 그럴때마다 찬성은 '늑대같은 나쁜 놈들' 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그렇게 라도 그녀에게 곁에 다가가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그렇게 고이 고이 마음에만 품고 있던 그.녀.였는데...
어제 그녀는 폭탄 선언을 했다.
입사동기인 박대리와 약.혼.을 한다는것이었다.
하필이면 점심시간에. 그것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보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구내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는 도중에 이야기를 할껀 모람.
'나 약혼하니까 더 이상 내 주위를 맴돌지 말라는 뜻인지.'
'앙큼하게 알면서 찬성이 놀라는 얼굴을 재미삼아 보려는 의도인지'
것도 아님,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건지...
식판을 들고 같은 탁자에 앉을때 까지만 해도 좋았다.
왠일인지 그녀가 싱글 벙글 웃으며 찬성을 웃을때 까지도 좋았다.
그녀의 입에서 약.혼. 소리가 나왔을때 찬성은 그녀가 자기에게 약혼해 달라는 이야기 인줄 착각했었다.
자세히 듣고 보니, 다른 박대리와 약혼한다는 이야기 였다.
"저, 박대리님과 약혼...." 하고 그냥 웃으니, 약혼을 한다는건지 하자는건지 누가 알수 있으랴.
그 뒤가 "해주세요", "할래요?" 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난 아무것도 몰라' 란 표정으로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약.혼 이야기 하는 그녀의 얼굴을 찬성은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얼마뒤 찬성의 뒤통수에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왜?
왜?
Why!!!!!!!
하필이면 박대리야. 당장 그만둬!!!
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박대리 그러니까 찬성과 성은 같지만,
이름도 외모도 아주 다른 회계부의 '박대리'
그도 입사동기지만 평소에 찬성은 그 '박대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기생오리비 처럼 생긴 외모를 무기로 삼아
여자 수십명은 후리고 다녔을 그런 얍쌉한 놈' 이라고 찬성은 생각했었기 때문에.
실제로 같은 회사 여직원중에 몇명은 그 박대리 놈에게 당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소문의 주인공 여자들이 오히려 더 쉬쉬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진짜로 밝혀진건 하나도 없지만, 아니땐 굴뚝에 연기 날까.
하여간, 찬성은 그녀의 폭탄선언을 듣고 오후내내 마음이 화끈거려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수 없었다.
사무실에 이상태로 더 있다간 미쳐서 창밖을 뛰어 내릴것 같아서 부장책상위에 메모를 남겨놓고 조퇴를 했다.
'급한일이 있어서 조퇴합니다. - 박찬성 -'
회사빌딩을 나와 영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응. 왠일이야"
"나 죽을것 같으니까 술 좀 사줘라"
"무슨일인데? 부장이 또 엿 먹였냐??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왜그래. 백주 대낮에"
"백주 대낮이고 뭐고. 지금 당장 안 나오면 나 한강 다리에 매달리러 갈꺼다"
"참.. 나.. 뭔일인데 그러냐? 차근 차근..........."
"뭔 사설이 그렇게 길어. 나오기 싫으면 끊어"
"아.. 아... 알았어. 거기 어디야. 나갈께."
그렇게 영수와 뻘건 대낮 2시부터 술을 마셨다.
"그러니까 미리 콕 침 발라 두라니깐. 하여간 인생선배 말을 안들어요"
"시끄럽다. 술이나 따라."
"너희 부장 지금 열 무지 받았겠다. '급한일이 있어서 조퇴합니다' 라고 써 놓고 사라졌으니, 지금쯤 꼭지 열렸겠다.
"꼭지가 열리던 말던"
"그러지 말고 쪽지에 그렇게 쓰지 그랬냐. '미칠것 같아서 그냥 뛰쳐나가요'라고"
"시끄럽다 그랬다"
"이게 친구 불러놓고 성질이야."
영수와 찬성은 그렇게 서로 핀잔을 주며 술을 밤 늦도록 마셨다.
얼마나 마셨는지 찬성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렇게 찬성은 어제 저녁 5년동안 짝사랑했던 그녀와 헤어졌다.
아니 떠나 보냈다.
'세상에 널린게 여잔데. 오늘부터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날꺼야.'
찬성은 서랍에서 츄리닝을 꺼내 입으며 유행가 같은 가사처럼 뻔한 말로 자신을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