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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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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외롭지 않아.


BY 아파트 2003-11-25

10.09.08.07.06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관자놀이를 살짝 찡그리는 갓 대학생 승우의 모습이 싱그러워 보였다.

깔끔한 t셔츠와 면바지를 받쳐 입고 있는 모습.

그 사이 저 멀리서 달려오는 여자.

자신에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걸어온 여자였다. 정해인...

어깨까지 오는 머리 길이에 웨이브를 했고, 청바지는 찢어져 있었다.

상의는 색바랜 청자켓이었고, 어깨춤에 설계도면을 들고 뛰는 모습.

그녀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10분 54초 늦었어"

"헥헥... 미....미안"

 

해인이 어깨춤에 끼고 있던 승우에게 내밀었다.

 

"정말 최선을 다한거야. 내 비장의 카든데"

"비장의 카드?"

"너하고 결혼할 때... 내가 이거 내밀면서 프로포즈 할라고 했거든"

"프로포즈? 쿡쿡 누가 너랑 결혼한대?"

"어쭈? 다시 빼앗기고 싶어?"

"야, 그리고 프로포즈는 해도 내가 해야지. 여자인 니가 하냐? 도무지 그림이 안된다."

"이십일세기 그림!"

"이십일세기? 이십일세기에는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데 무슨..."

"쿡쿡 하여간 사랑하는 이에게 주고 싶은 설계도면이야. 동생도 좋아할꺼야"

"그래 무지무지 고맙다"

"잘될꺼야. 힘내!"

"그럴꺼다"

 

20cm는 작은 해인의 투명한 이마위로 짧은 입맞춤을 맞추고는 183cm의 승우는 성큼성큼 등을 보이며 뛰어 갔다.

해인이 그를 향해 크게 원을 지어 가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굿럭(Good lock)"

 

달리면서도 등을 보이며 그가 손을 흔들었다.

고맙다. 해인아...

모든게 잘될꺼다. 니가 있으니깐. 그리고 ... 그리고... 이젠 외롭지 않아.

 

 

S대학 병원.

1인실 무균실을 향하는 그의 표정이 밝아져있었다.

그가 16살의 [조승하]라는 이름표가 달린 침대 앞에 곧바로 섰다.

그리고 눈도 뜨지 몸한 그의 옆에 설계도면을 내려 놓았다.

형 왔다. 임마! 눈 좀 떠봐라.

형 보이냐? 승하야... 니가 살고 싶다던 그런 집 내가 가져왔다.

내가 직접 그리고 싶었는데 도통 나는 재주가 없다.

그래서 내가 너 만큼 사랑하는 여자한테 부탁한거야.

마음도 잘통하니 내 맘이 들어가 있으리라 믿는다.  

어서 눈 떠봐. 우리 이 집 지을려면 너 공부 열심히 해서 건축학도 되야지.

응? 승하야! 조승하... ... 우리 승하. 이렇게 가는건 말도 안되고 세상의 이치도 아니고.

그리고 내가 보내지도 않아.

나보다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좋고. 전교1등 한번 놓친적 없는 수재인 니가 왜 우리에게 이런일이 있냐고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쥐어 잡고 흔들고 싶다.

근데 그 원인 제공자라는 인간이 나타나질 않는다.

내가 겁나설꺼야. 그러니 너의 목숨 또한 가져가질 못할꺼야.

내 앞에 조차 나타나지 못하는 겁쟁이니깐.

그러니깐 승하야 절대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

너 나때문에 외롭지 않다고 했지?

나도 이젠 외롭지 않아. 그래서 쓰러지지 않아.

그러니 넌 나에게 마구마구 기대 버려. 너의 아픔 까지 나에게 줘버려.

내가 너만큼 사랑한다는 여자는 니 형수감으로 최고인 여자지.

물론 내 여자로도 차고 넘치지.

패기와 열정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섬머슴 같은 행동 뒤의 내면적인 아름다움도 공존하는 그런 여자다.

그런 아름다움이 더 눈부시다는거. 우린 형제니깐 알수 있을 꺼다. 그지?

샘이 난다구? 쿡쿡

넌 운이 좋고, 멋진 놈이니깐 일어나 나와 한판 싸워서 빼앗아 봐.

cf 로고 중에 이런말이 있지?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구.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아.

하지만 너와의 쟁취는 눈물 겨울 만큼 아름다울 꺼다.

 

 까물락까물락 긴 손눈썹 아래 가려진 조승하의 눈이 펼쳐 졌다.

순수와 열정이 죽음의 공포에 감싸진 눈동자.

하지만 아름다웠다.

 

승우가 물기 고인 눈물을 말리고 승하는 애써 지어지지도 않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나오지도 않는 소리를 산소마스크 안에서 쉼없이 내뱉고 있었다.

 

나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사...살고 싶다. 혀....형.

 

 

"선배, 전 정말 선배 그러는거 부담스러워요"

 

해인의 짜증기가 묻어난 목소리였다.

학교 근처 작은 카페였다.

실내였지만 사람도 없고, 분위기 또한 가라 앉아 있었다.

자신의 단짝인 윤경이 좋아하는 곳이라 단골이 되었지만 이런 분위기를 즐기는 해인은 아니었다.

"......"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못살아요."

"......정해인!"

"말씀하세요"

"안되겠냐?"

"네"

 

해인의 목소리에 이젠 한계에 다다란 인내의 끝이 베어져 있었다.

 

"말도 안되요. 어떻게... 저 겨우 스무살이예요.

고3 지옥같은 감옥 같은 열아홉 피해 나와서 겨우 숨쉴만하니깐 결혼하자구요?

말이 된다고 생각 하세요?"

"결혼이 아니라 유학이지"

"선배가 내 공부 시켜준다구요?"

"물론이야. 어차피 너도 유학 가야 될꺼 아냐. 교수 까지 될려면"

"거야 그렇죠. 선배 자신 있어요?"

"자신? 물론이야"

 

자신감에 넘쳐 경솔해 보이기 까지 하는 장세우가 해인의 앞에서 얼굴을 바로 들었다.

세경 그룹 차남이자 S대 건축학과 같은 과 선배인 장세우가 죽자사자 그녀를 쫓아 다니고 있었다.

 

"그럼 세경그룹에서 저한테 투자를 하는 거네요?"

"그렇게 되는 건가? 하하 그렇겠네"

"좋아요. 그럼 투자를 받죠.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조건?"

"결혼이니 뭐 이런건 안되요.

전적으로 유학이요. 물론 투자를 해주신다면 세경 그룹에서 일할 용이는 있구요.

선배 델라웨어로 유학하신댔죠?

난 뉴욕으로 가겠어요. 넓은 미국에서 차로 서너시간 밖에 안걸리니깐 먼 거리도 아니구"

"정 해...해인!"

 

당황했는지 아님 충격을 먹었는지 장세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가 버렸다.

속이 시원했다.

해인도 카페에 계산을 하고 나무문을 밀고 나왔다.

하늘에서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승우씨 보고 있니? 너무 희게 떨어지는 눈송이. 만지지도 못할 것 같은 순결.

당신도 보고 있니? 참... 승우씨 동생도 보고 있나요?

.... .... 도련님? 후후, 나에게 이런면이....

하지만 승우씨 동생분도 이 아름다움을 보세요.

그리고 삶의 의욕을 가지세요. 형이 있잖아요.

난 형이 있어 외롭지 않아요. 당신도 그렇죠?

그러고보니 우린 참 형없이는 안되는 사람이군요. 그렇죠?

 

그 시간 1인실 무균실에서 다시 안정제를 맞고 승하가 잠들자 승우가 이불을 덥어 주고 창곁에 가서 섰다. 버릇대로 담배라도 한대 피웠으면 했는데 담배가 없었고, 그곳은 무균실이었다.

끊어야 하는데... 하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담배.

그리고 이 흰눈. 참 서글프게도 오네. 조승우는 승하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네번째 손가락 손톱 아래로 꼬맨 자국이 보였다.

어릴적 눈싸움을 하다 자신이 날카로운 돌을 넣어 눈을 만들어 집어 던져 생긴 흉터였다.

많은 피를 흘리며 우는 동생을 보며 그때 조승우가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껴서일까.

그러고부터 그는 눈이 올때면 죄의식 부터 느껴졌고, 승하가 병원에 들어오고 부터는 눈 자체가 서글프고 싫었다.

승하가 결혼을 하게 되면 네번째 손에 결혼반지를 낄 것이고, 그럼 자신의 죄의식이 더 커질 테니 어떤 이름 모를 나쁜 놈이 승하를 결혼 조차 못하게 눕혀 놓은 것인가.

나를 위한답시고.

다시 승하를 예전처럼 건강하게만 해준다면 그깟 죄의식이 무언가.

그냥 철판 깔고 눈덩이 속에 바늘이라도 꽂아 던지리라.

그래서 승하가 살아날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