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보다 가까운 가게에서, 미은이의 집에 도착한 시간은 39분 43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망설임없이 벨을 눌렀다.
약간은 심장의 고동소리가 크게 들리는 기분.
문은 아주 천천히 조금씩 열렸다.
문 손잡이를 잡고 활짝 문을 열어젖힌 쪽은 오히려 나였다.
"오빠…? 왠일이야?"
난 미은이의 손을 잡고 복도쪽으로 끌어내었다.
두 둔이 휘둥그레진 미은이와의 눈싸움을 할 여유조차 없이 난 미은이의 볼에, 입술에, 이마에 쉴새없이 입을 맞추었다.
꼴딱꼴딱 미은이의 목젖에서 울리는 소리에 맞춰 나역시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그녀를 꽉 안아주었다.
막판 달리기의 결승점을 넘은 것처럼 속 깊은 곳에서 낮은 탄식이 내쉬어졌다.
"오빠…"
"미은아, 잠깐 오빠 말 먼저 들어봐. 일단은 정말 미안하다. 많이 속상했지?"
나의 마지막 말을 듣기도 전에 미은이의 눈에서는 작은 유리알같은 투명한 눈물이 글썽대고 있었다.
손을 들어 그 아이의 눈물을 닦아내어도 그 녀석은 자꾸만 자꾸만 투명한 이슬을 생산해대는 눈물공장처럼 하염없이 만들뿐이었다.
"울지마, 오빠가 너무 나빴어. 내 동생일에 묵묵히 옆에 있어준 우리 착한 미은이한테 내가 너무 바보처럼 굴었어. 나도 내가 이렇게 무디고 바보같은 놈일줄은 몰랐다.
세상누구한테 보다도 너한테 만큼은 멋지게 보이고 싶었는데 이렇게 이쁜 울 미은이 눈에서 눈물이나 나게 만들고 말이야. 오빠가 이제부터 잘할게. 진짜진짜 잘할게. 그러니까 서운한 마음 이제 그만 걷어주라. 응?"
미은이는 울면서도 입을 뾰족하게 만들어서는 그 귀여운 눈썹마저 한껏 올리고 날 쳐다봤다.
"정말 이제부터는 나한테 잘할거야? 나 안 서운하게 만들 수 있어?"
"그러어엄!"
"치~. 그럼 약속해봐."
작은 미은이의 새끼 손가락이 내 코위로 불쑥 솓아올랐다.
"에이, 우리 미은이도 바보네? 이렇게 손가락하나로 어디 약속이라고 할 수 있겠냐? 자, 두 손 다 줘봐.약속하고 , 도장찍고, 카피하고.. 어때? 이정도는 되야지."
미은이는 그새 끼득끼득 웃고 있었다.
복도창문으로 해가 지면서 마지막 햇살광선을 마구 쏘아대고있었다.
하얀 복도 벽에 기댄 미은이의 작은 얼굴이 수채화로 그린 만화처럼 색깔고운 모습으로 내 가슴 속 한복판에 깊이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다시한번 그 애에게 입맞춤을 하려는 순간, 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미은아~ 밖에 누가 왔니?"
"오빠, 빨리가. 엄마계셔."
그 애는 날 엘리베이터쪽 벽으로 밀다시피했다.
"나 인사하고 갈게. 안돼?"
"싫어, 오늘은. 울 엄마한테 내 남친이 날 울리는 사람으로 기억하게 하고 싶지않단 말이야. 다음에 정식으로 멋지게 울엄마한테 소개할거야. 오빠, 그러니까 이젠 약속 꼭 지켜? 어서 가."
내 볼에 아주 잠깐 그녀의 빨간 입술을 스친 후 미은이는 다시 문 뒤로 사라져버렸다.
엄마에게 멋진 남친으로 보여주고 싶다고?
저 작은 머리에서 어떻게 그렇게 깜찍한 발상을 할 수 있을까?
나에게 그 애는 언제나 새로운 나를 느끼게 해주는 봄날의 작은 샘이다.
감칠맛 나는 그애의 입술처럼 늘 싱그러운 자극을 주는 나의 작은 요정.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누군가 내 맘을 엿보는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가벼워진 발걸음,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지는 사랑노래.
맞다, 난 어느덧 사랑이라는 낯선 감정에 흠뻑 빠진 콩깍지병근이가 된 걸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