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실로 들어가는 길은 깔끔한 몇 개의 액자와 꽃들이 놓여있었다.
"앉게나. 자넨 내가 누군지 궁굼하지 않나?"
"궁금하지요, 하지만 여쭐 타이밍을 자꾸 제가 놓친다 아닙니꺼?"
회장은 웃었다.
아무것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비서가 두 잔의 생수를 가져왔다.
고즈넉한 사무실에서 계단을 올라온 후 마시는 시원한 물 한잔.
웅주도 꽤나 좋아하는 느낌이었다.
"난 보다시피 다운커뮤니케이션을 이끌고 있는 사람일세. 우리 회사는 세계 각국의 전문인력들을 국내 기업과 연결해주고 보다 합리적인 시스템을 컨설팅 하는 회사라네. 좀 웃기는 일이지만 우리 회사가 하는 다른 사업 중에 하나는 집이나 건물을 만드는 일이지. 지금 지군이 일하고 있는 그런 건축물들 말일세. 단순히 건물이나 주택만 만드는 게 아니라 나는 시간을 초월해서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을 만들려고 노력한다네.
그래서 건축물을 만들고 그 건축물이 어떻게 활용될 것인지에 대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지, 그래야 그 건물을 사는 사람들이 경기를 안타고, 그 건물들을 헐거나 개조하지 않고 오래도록 같은 자리에 둘거 아닌가?
난 사람을 만드는 것은 교육과 환경이라고 생각하네. 그래서 우리 회사는 좋은 사람. 제 자리에 딱 들어 맞는 사람을 필요한 위치에 연결하는 일을 하게 되었지. 건물을 짓는 것은 내가 평생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웅주군."
"예?"
"자넨 꿈이 뭔가?"
"꿈요?"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웅주에게 꿈을 물어본 사람은 없었다.
워낙 에 정신 못 차리고 10대부터 사고를 치고 다니던 그에겐 그저 큰 사고만 저지르지 않고 지내기만을 바라는 눈빛들 뿐이었다.
물론 부모님은 당신들이 시인으로서 삶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아들이 공부에도 다른 어떤 것들에도 관심이 없음을 알고 하루라고 빨리 뭔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길 바라고 있었다. 웅주가 하루아침에 철이 든지도 얼마되지않아서 그 역시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되어있을지는 아직 결정하고 있지 못했다.
그래도 그에겐 한가지 확실히 먼저해내야할 일이 있었다.
솔직해지자는 마음이 들었다.
이 노인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어른이기에 어설픈 거짓대답은 쓸모가 없을 것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또 저에 대해 잘 모르시지만 전 철든 지 얼마 안됐습니다. 근 10년을 남들이 공부다 일이다 대학이다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때에도 진 그저 세상에 대해 이유 없이 화가 많이 나데요. 그래서 공부도 안하고 어쩔 수 없이 군대 가가 지내다 제대하고서도 몇 년을 그저 흥청망청 안 살았습니꺼? 그래서 어른신이 기대하기는 것처럼 멋진 꿈은 없심더.
지한텐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심더. 꿈요? 지 올해의 꿈은 절 완전히 비워내는 기라예. 다 비워내가가 홀랑 마음이 편안해지믄 그 때 새로운 걸 담을 용기가 생길 거 같슴니더.이게 제 대답이라예."
회장은 웃었다.
"자네 정말 맘에 들어. 맞는 얘기야, 아무리 원대한 꿈이 있더라도 자신을 비워내지 않으면 새로운걸 담을 그릇이 생기지 않는 법이네. 일하는 건 재미있는가?"
"예, 정말 좋심더."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파일을 하나 가지고 웅주에게 내밀었다.
"내 상하나 준다고 햇지? 이게 내 상일세. 펴보게."
웅주는 파일을 열어보았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외국 노인네와 지금보다 20년쯤은 젊어 보이는 회장이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있었다.
"자네 지금부터 내 예기를 잘 듣게. 이건 20년 전의 사진일세.이때가 내가 45살이엇지. 1970년대초 평범한 가장이었던 나에겐 내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인 시기였어. 근 20년을 가까이 난 집 짓는 일을 했지. 하지만 그 때 내 사업이 망해버렸다네. 흔히들 40대에 쓰러지면 다시는 재기하기가 어렵다고들 하잖은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네. 자네 가난이 뭔지 아나? 할 수만 있다면 그런 게 이 세상에 존재하지않앗으면 하고 생각할 정도로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지.정신력만으로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게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겠네만 그 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노력과 또 그만큼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처지와 형편이 되어야만 하는 부분이 있는 거라네.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아내는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인지 깨달을 틈도 없이 많은 빚쟁이들에게 시달려야 했지.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네. 결국 난 결단을 내렸지. 죽음을 택하기로 말이야. 가족들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 때의 나의 정신 속에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거라는 생각으로만 가득 차있었다네. 하나 둘씩 주변을 정리하고 여기저기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다 바꾸어서 아내의 이름으로 통장을 하나 만들고는 편지를 쓰고는 소리소문도 없이 집을 나왔지. 그리고는 비행기를 타고는 독일로 갔다네."
"독일이요?"
"그래 그 때 당시 해외로 나가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지만 왠지 죽기 전에 꼭 한 번 독일을 가보고 싶었다네. 어린 시절부터 책 속에서 보았던 독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던가 봐. 아이와 자식들이 있는 이 곳에서 자살을 한다면 우리 가족이 너무도 괴로울 거라고 생각했지. 유럽의 그 나라에서 이름 없이 동양인이 죽었다손 치더라도 날 알아볼 사람도 없고… 그래도 막상 죽음을 결심하니 무서운 게 없더군.
다른 건 실패했어도 내가 가보고 싶었던 나라에서 조용히 죽을 생각을 하니 역설적이긴 하네만 웃음마저 머금게 되더군.양복을 입고 가방도 없이 날아간 독일. 근데 막상 도착하니 어디를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더구먼.
어차피 죽을 건데 실컷 독일 공기나 맡으면서 돌아다니다 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공항에서부터 무작정 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네.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걸었지 낮이나 밤이나..지금도 그 때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어. 사람이 물 한잔 안마시고 살수있는게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말일세 . 어느 날 새벽 더 이상은 걸을 수가 없을 만큼 되었지. 머리는 멍하고 목은 타 들어오고 배는 너무 고파서 눈 앞에선 아무것도 보이지도 귀로도 아무것도 들을 수 없을 만큼이 되었더군.
그 때야 깨달았지 내가 얼마나 살고 싶어하는지를...그 때만큼 산다는 것에 열정을 가진떄는 없었던 것 같아. 죽으려고 떠나온 독일의 어느 시골길에서 살고 싶은 나를 발견한 그 때에 난 내가 곧 죽을 것을 깨달았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