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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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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사랑 32


BY 제인 2003-11-14

고수가 병원에 도착했을때는 할머니는 의식을 회복한 후였다.

"할머니, 고수왔어요."

"응....우리 장손오셨구나.....끙...."

할머니는 기운이 없어 말을 잘 잇지를 못하였다.

어린시절부터 '우리 장손'이라고 부르며 업어주고 먹여주시던 할머니였다.

누나나 남동생은 항상 뒷전이었다.

오로지 장손인 고수에게만 맛있고 좋은 것을 아껴두었다 주시곤 했다.

"...끄응...우리 장손 색시얻는 거 보고 가야할텐데....증손주 보고 가야할텐데...."

"할머니, 어서 기운차리세요."

할머니가 큰고비를 넘기고 나자 고수네 가족은 할머니를 모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고수와 시집간 누나까지 할머니소식에 달려오느라 오랫만에 온 가족이 모이게되었다.

고수의 아버지가 물었다.

"너 올해만 가면 졸업이구나. 취직준비는 잘 하고 있냐?"

"여름방학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아요. 저의 과는 취직할 데 많아서 걱정없어요."

"다행이다. 요새 아주 취직난이라고 신문이고 방송이고 난리더라."

"걱정마세요."

"그리고...흠....할머니 말씀대로 얼른 장가가라. 졸업하고 취직하면 바로 식올리게 선이라도 보는 게 좋겠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손주까지 안겨드리면 더욱 좋고."

"네? 아, 아버지, 저 결혼생각 없어요."

"어차피 해야할 거 빨리 해서 빨리 자손도 보고 하는게 좋지, 뭐하러 미루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야 결혼을 하죠."

"내가 같이 사업을 하는 분이 있다. 대구에서 아주 큰 건설회사 사장님인데, 그분한테 딸이 하나 있어. 대구의 모대학에 다니고. 내가 아들자랑을 좀 했더니 관심을 보이더구나. 서울서 유명한 미술대학 다닌다고 말이지....허허허....한번 선을 보면 어떻겠냐?"

"말도 안돼요."

"뭐가 말이 안돼? 그러지 말고 한번 봐. 얼굴도 아주 예쁘다더라."

아버지는 건설업체 하청을 하다가 주거래를 하는 지방건설회사 사장님과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

자기보다 규모가 훨씬 큰 회사와 사돈을 맺고 싶어 고수에게 자꾸 선을 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저는요...결혼 생각없어요. 전 결혼같은 거 안할 거예요."

"뭐야? 결혼을 아주 안할거야?"

"네."

"아니 이놈이, 뉘집 대를 끊을려고 이러는 거야?"

"대요? 우리집이 무슨 대이을 가문이라고..."

"뭣이 어째?"

아버지는 성이나서 소리를 벌컥 지르며 고수의 머리를 한대 쥐어박았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막노동꾼 집안이지만, 대를 끊어도 좋을 그런 집안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아버지로서는 참으로 치욕적이었던 것이다.

"너 이자식, 애비가 뭘로 보이는 거야?!"

"아윽,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자꾸 결혼하라 하지 마세요. 저 아직 생각없단 말예요!"

고수도 화가나서 소리를 질렀다.

씩씩거리던 아버지는 고수에게 너무 이른 요구를 한것인가 싶어 얘기를 그만두었다.

 

고수는 미연이 걱정되었다.

어젯밤 그렇게 헤어지고 난 후 자기가 오늘 가게에 안 나타나 뭐라고 생각할지 궁금했다.

'누나가 역시 자길 사랑하지 않는구나, 이젠 피하는구나...하고 생각하면 어쩌지? 빨리 서울에 올라가야 할텐데 할머니가 회복되는 건 봐야 하잖아....죽겠네....전화를 할까? 전화로 뭐라고 하지? 에이....'

키 큰 고수는 조그만 동생의 방에 서서 왔다갔다 안절부절을 한다.

"형, 정신없어. 그만 좀 앉아."하고 동생이 짜증을 부린다.

 

할머니는 완전히 기운을 차리지 못한 채 잠만 주무셨다.

고수의 가족들은 침통한 분위기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다 먹고 나니 서울의 병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 "고수냐? 할머니는 어떠셔?"

"아직 좀 편찮으셔."

- "저런...빨리 나으셔야 할텐데. 그런데, 너 있잖아, 내 얘기 잘 들어. 내가 누나를 만났었거든."

"만났다구? 만나서 무슨 얘기 했는데?"

- "너보고 고아라고 했다."

"미쳤냐, 너???"

- "아, 내 얘기 좀 잘 들어봐. 너 아무말 말고 고아인척 해봐. 그 누나가 그래도 너 좋다고 하면 진짜로 널 좋아하는 거잖아. 그렇지 않고 태도가 바뀐다면 그건 널 뭘 보고 좋아한 거겠냐? 니가 부잣집 아들인가보다 하고 꼬리친 거지."

"이 자식 말하는 거 봐. 누나가 언제 꼬리를 쳤어, 너..."

- "아, 아, 그래, 미안, 미안, ....어쨌든, 한 번 두고 보라구. 그 누나 인간성 한번 시험해 보는 것도 좋은 생각 아냐?"

"야, 이 빙신아, 고아라고 하면 어떻게 해? 나 군대갔다 온 줄 누나가 뻔히 아는데. 고아면 어떻게 군댈 갔다 오냐? 아휴..."

- "어, 참, 그렇지. 근데 그 누나는 믿던데?"

"믿어? 네 말을?"

- "그랬다니깐. 거봐라, 그 누나 좀 모자라잖아."

"뭐라고? 너 죽을 줄 알아. 올라가서 보자. 넌 죽었어."

- " 알았어, 알았어...오거던 바로 연락해. 언제 오는데?"

"할머니가 낫는 거 봐야지...이번주 안으론 가겠지 뭐."

고수는 병문의 전화를 받고 더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뻔히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하다니, 그 사실을 알면 누나가 자기를 얼마나 실없는 인간으로 볼것인가.

고수는 지금의 시간이 단단한 고무줄처럼 빡빡하게 느껴졌다.

'왜 이리도 시간이 안가는 거야? 그나저나 누나한테 뭐라고 변명을 한담....병문이 그 자식, 죽일 놈같으니...'

 

미연은 고수가 일하러 오지를 않아 경주라고 하는 다른 아르바이트 여학생과 시간을 조절해서 일을해야했다.

미연은 고수가 없는 시간 동안 웬지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틀에 한번 꼴은 만나서 함께 수다를 떨었고 집에 있을때면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함께 인터넷게임도 하고 그랬었는데 벌써 일주일 내내 한통의 전화도 없었다.

벌써 토요일이 되었다.

'아직도 소식이 없네? 어찌된 일이지?'

바쁜 토요일이었는데 자꾸 고수 생각이 나서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포장이 자꾸 흐트러지고 거스름 돈도 잘못 세는 실수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언니, 오늘 왜 그래요?"

"그, 글쎄...."

"피곤해요? 하긴 고수없이 혼자 하는 시간이 많아서 그동안 힘들었겠다. 미안해 언니, 제가 수업도 많고 어학원도 다니고 하느라 많이 못 도와드려서요..."

"아니, 뭐 괜찮아..."

경주는 오후 5시가 되자 가게를 떠났다.

혼자 남은 미연은 마음이 더욱 착찹했다.

손님이 많은 편이라 그나마 정신없이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한 시간만 있으면 문을 닫고 갈 시간이었다.

기운없이 카운터 의자에 앉아 멍청하게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키가 큰 남자의 모습이 문밖에 어른거렸다.

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수였다.

미연은 고수가 들어와 자신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며 너무나 반가왔다.

"누나..."

"고수야, 너 어디갔었어?"

"시골에..."

"얼마나 걱정했는데."

"나 걱정했었어?"

"그럼."

"정말?"

"그래."

고수는 미연이 자신을 걱정했다는 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하여 자신을 가지고 다시 한번 고백을 하였다.

"누나, 나 일주일 간 열심히 생각해 봤는데...역시, 나....누나 사랑하는 거 같아."

"......."

미연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고수에 대한 걱정, 그리움...그런 건 다 뭘까? 나도 고수를 사랑하고 있는 거 아닐까? 그럴리가...그런데 왜 이렇게 고수를 만나니까 반가운 거지? 왜 그렇게 보고싶었던 거지?'

미연은 아무말 없이 고수의 얼굴만 올려다 보고 있었다.

고수는 미연을 천천히 포옹하였다.

미연도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따스함에 도취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가게문이 열리고 손님이 하나 들어왔다.

두 사람은 당황하여 얼른 서로에게서 떨어져 카운터에 멋적은 얼굴을 하고 섰다.

들어온 손님은 검은 양복을 빼입은 신사였는데 놀란 표정을 하고 미연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미연과 고수가 잠시 포옹한 순간을 보게되었던 것이다.

미연은 그를 알아보고 깜짝 놀란다.

"어머, 명민아!"

"미연이, 오랫만이다."

"여길 어떻게 왔어?"

명민은 미연에게로 가까이 와서는 고수의 얼굴을 흘끔 올려다 본 후 미연을 다시 쳐다본다.

미연은 고수에게 "내 대학 동창이야." 하고 명민에게는 "여기서 일하는 학생."하며 서로를 인사시켰다.

고수는 "안녕하세요?"하고 명민에게 인사을 하더니 미연에게 "누나, 가게는 내가 닫고 갈테니 먼저 가."하였다.

미연은 그러겠다고 하고 가방을 챙겼다.

고수는 "누나, 이따가 전화할께."하고 명민과 함께 가게를 나가는 미연의 뒤에다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