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형선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생각은 그래. 사랑에는 국경이고 뭐고 없는 거야. 좋으면 그만이지 더 볼게 뭐 있겠냐. 하지만, 너의 부모님 생각도 해야지. 너 이러는 거 알면 뭐라시겠냐?"
고수 - "부모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문제지."
형선 - "결혼이란 게 그렇지가 않지."
고수 - "내가 언제 결혼한댔어? 결혼얘기는 왜 하냐?"
병문 - "아이, 이 사람아, 결혼할 거 아니면, 그럼 자네는 그냥 아줌마 한번 건드려보고 싶은 거 밖엔 안되잖어."
고수 - "참내...나 진짜 누나 좋아해. 괜히 한번 그래보는 것이 아니라구. 하지만 결혼하자는 것도 아냐. 결혼 안해도 좋아하고 같이 살구...그럴 수 있는 거 아니냐? 이해가 안가?"
형선 - "이해가 안 갈 것도 없지. 사실 할 수 있으면 그게 젤 낫지. 책임질 것도 없이 실컷 즐기고...흐흐...그런데 누나도 그런 걸 원하냐?"
고수 - "아닌 거 같아. 저번에 그러더라. 여자들은 진지한 걸 원한다고."
형선 - "거봐. 너 그렇게 나오면 그 누나가 널 받아들이겠어? 기분나빠할 걸?"
고수 - "그럼 어쩌지?"
병문 - "어쩌긴 뭘 어째. 헤어져. 그 누나 만나지 마. 말이 되는 얘기야, 지금?"
고수 - "그럴 수 없을 거 같아."
병문 - "못 헤어져? 그럼 같이 살어버려. 그렇게 좋으면 같이 살면 되지 뭐."
고수 - "어떻게? 오늘도 집에 가라고해서 그냥 돌아왔는데...후...다시는 누나가 집에 못오게 할 거 같아."
병문 - "갈 곳이 없다고 하고 짐싸서 들어가버려."
고수 - "나 여기 사는 거 다 아는데?"
병문 - "살 곳이 없어졌다고 그래. 그렇지. 형선이가 외국지사 나가느라 방뺐다고 해."
고수 - "누나가 다른 자취방 구하라고 하면?"
병문 - "돈이 없다고 해라. 으이구, 그래 그래, 너 고아라고 해라."
형선 - "뭐, 고아? 으하하하....그걸 말이라고 하나?"
병문 - "아니 왜? 집도 절도 돈도 아무것도 없다고 해. 그래야 널 받아주지."
고수 - "그런 걸 누가 믿냐? 누나가 뭐 바본 줄 알아?"
병문 - "아이구, 이 사람이 멀 몰라. 여자들은 그런 거에 속는다니깐. 너 뉴스도 못봤냐? 무슨 사법연수원생이네 방송국 PD네 하면 그냥 홀라당 넘어가서 돈주고 몸주고...그런 게 여자야. 너도 가서 고아라 해봐라. 속아가지고는 너 불쌍타고 당장 들어오라하지."
고수 - "에이...말도 안돼. 누나가 얼마나 똑똑한 데 그런 거에 속을까..."
병문 - "쳇, 똑똑한 데 그런 쬐끄만 구멍가게같은데서 일하냐? 어디 되나 안되나 한 번 해볼까? 좋아. 내가 낼 가서 그 누난지 아줌만지핱네 얘기할테니까 두고 봐."
고수는 별 효과없는 대화를 했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형선은 병문에게 "아니, 같이 못살게 해야지, 자꾸 같이 살라고 부추기면 어떻게 해?"하고 나무란다.
그러자 병문은 "허허...내가 그런다고 그 아줌마가 그 말을 진짜로 믿을 거 같어? 고수녀석 그냥 망신만 당하고 끝날 걸."
형선은 "아냐, 그 아줌마 착해보이던데...? 진짜로 믿어버려서 고수보고 들어와 살라면 어쩌지?"하고 걱정한다.
병문은 "아이구, 믿으면 더 잘되었지. 생각해봐. 어떤 여자가 고아라는 데 좋아하겠어? 요즘 여자들 남자볼때 집안, 돈....그런 거 밖에 안본다구. 가진 거 하나 없는 고아라고 하면 뒤도 안돌아볼거다."하고 말한다.
"그런데 왜 아줌마한테 그래? 고수 마음을 돌려야지?"
"아줌마가 먼저 쌀쌀맞게 굴어야 고수도 맘 접지. 그 여자 보니까 고수한테 헤헤거리고 애교떨던 걸? 보니까...돈 좀 있는 남자 물어서 어떻게 팔자좀 고쳐보려는 그런 여자같지 않냐? 고수가 겉보기에는 부잣집 아들처럼 생겼잖어."
"....그런...가...?"
"그래. 내 말대로 한 번 해보자구.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잖어? 나중에 고수네 부모님이 아셔봐, 우리보고 뭐라 하시겠어? 옆에서들 뭣들했냐고 원망들을 거 아냐?"
고수가 방에 들어가 잠이 든 사이 두 사람은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눈다.
영준은 선아와 약혼하려던 계획이 어머니로 인해 물거품이 되자 실의에 빠져 문밖으로 나가지를 않았다.
월요일인데 회사에 나갈 생각도 않고 방에 쳐박혀 멍하니 먼 창밖만 바라보았다.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의 음반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이종현이라는 후배였다.
"형, 오늘 집에 있을거예요? 어디 아파요?"
"아니, 괜찮아."
"좀 문제가 생겼는데요....유선아요. 계약취소 통보해왔어요."
"........"
"형, 괜찮아요?"
"그래서?"
"그러면 고소할 수 있다고 그랬더니 위약금 물겠대요."
"........"
"형, 괜찮으면 회사에 좀 나와보세요. 그거 말고도 문제가...."
"그럴께."
영준은 세상 살기가 싫었다.
그냥 이대로 공기가 되어 흩어져버리고 싶었다.
침대위에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파묻었다.
"영준아..."
기운빠진 어머니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어머니에 대해 화가 단단히 나있는지라 영준은 들은 척 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영준은 무슨 소린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갔다.
어머니가 쓰러져 있었다.
하혈을 하여 마루에는 피가 흘러있었다.
영준은 얼른 앰뷸런스를 불러 어머니를 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자궁암 말기이십니다."
"네? 그럼..."
"너무 놀라실 것은 없습니다. 지금 연세에 하혈을 하신 걸 보면 말기임에 틀림없는데.. 그래도 자궁암은 완치율이 80%에 달하는 치료가능한 병입니다. 초기에 발견했다면 자궁제거로 쉽게 완치될 수도 있었을텐데, 지금으로서는 수술 아니면 방사선이나 약물같은 장기치료를 생각해야겠죠."
"아까 정신을 잃으셨었는데요."
"그건 빈혈때문이니까 크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영준은 치료가 가능하다는 소리에 한시름 놓는다.
"일단 입원해서 조직검사를 받으셔야하니 수속을 하십시요."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영준은 어머니의 병실로 가서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옆에 앉는다.
창밖쪽으로 돌아누워있는 어머니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영준에게 말한다.
"나 얼마나 산다던?"
"생명에 지장없대요."
"너, 나 빨리 죽었으면 좋겠지?"
"어머니..."
"네 맘 다 알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혼자 있고 싶으니 넌 집에 돌아가라."
"어머니..."
"가라고."
영준은 병실에 어머니를 혼자 두고 병원건물밖으로 나와 주차장으로 갔다.
차를 타고 출발하려다 전화를 꺼내 누나에게 전화를 한다.
"누나, 저예요."
-"그래 왜?"
"어머니가 아프셔요."
-"그래서?"
"자궁암이래요."
-"........"
"여기 J병원이예요. 506호에 입원해 계세요."
-"엄마 다시는 안보기로 했다. 죽든 말든 나 상관하지 않아. 엄마 일로 전화하지 마라."
"누나..."
누나쪽에서 '뚝'하고 전화끊는 소리가 났다.
영준은 머리를 뒤로 한번 쓸어낸 다음 차를 몰고 병원을 떠났다.
여덟살이나 많은 아버지가 다른 누나는 예전부터도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영준도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누나처럼 그렇게 내색을 하지는 못했다.
누나는 이번 영준의 파혼으로 어머니에게 쌓였던 감정이 폭발하였다.
아버지도 모르고 자란 영준이 가여워서 어릴적부터 마음을 많이 써왔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지난 행동들로 인해 영준이 이런 모진 일을 당하자 어머니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에도 냉담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영준은 누나의 그런 심정을 이해했다.
자기도 누나처럼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한다.
영준은 회사에 들렀다.
직원들이 반갑게 맞았다.
"형, 나오셨군요."
"그래."
"선아때문에 문제예요. 걔한테 들인게 얼만데...계약취소도 문제지만, 그것때문에 주식값도 많이 떨어졌어요. 게다가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투자자들이 자꾸 손을 털고 있대요."
"소문이라니?"
후배는 영준에게 조간신문의 연예난을 펴서 보여준다.
'유선아, 데뷔한지 석달만에 은퇴. 가수생활에 환멸을 느껴'라고 제목이 달린 기사의 내용은 유선가가 가수생활을 시작한지 몇달만에 은퇴를 하는 이유가 소속음반사인 바람기획과의 마찰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기사 바로 아래에는 별개의 다른 기사가 실려있었는데 하필 내용이 이러했다.
'연예 기획사들 여자 연예인들에게 성상납 요구. K에이전시, B기획사등 성상납요구 의혹...'
영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런 거에 마음 쓸 거 없어."
후배 앞에선 담담하게 격려를 해주었지만 영준은 가슴이 답답하였다.
설상가상이었다.
파혼, 어머니의 병, 그리고 회사문제까지 함께 녹아 쇳덩어리가 되어 영준의 온 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