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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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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사랑 28


BY 제인 2003-11-11

영준이 맞선을 본 같은 일요일 날 고수는 같이 사는 형선이라는 친구를 데리고 미연의 집으로 갔다.

미연과 전자상가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미연은 오랫만의 나들이에 마음이 설렜다.

그동안 반찬사러 슈퍼에 가는 일이 쇼핑의 전부였던 터라 다른 사람들과 차를 타고 시내를 나간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들떴다.

미연은 아주 오랫만에 화장을 하였다.

그리고 전에 즐겨입던 짧은 치마를 꺼내 입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아직 쓸만하구나...'하고 자신에게 한마디 던진다.

밖에서 고수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외출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미연은 고수의 말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오자 현관문을 열었다.

고수는 두드리지도 않은 문이 갑자기 열리자 깜짝 놀란다.

그런데 그보다도 그때 문안에서 나타난 여자를 보고 더욱 깜짝 놀랐다.

길게 머리를 늘어뜨린 인형같은 여자가 자기를 올려다 보고 있는 것이었다.

고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미연을 내려다보며 "누나....너무 예쁘다...."하고 감탄을 한다.

"그래? 고마와."

고수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미연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동안 옆에 서있던 형선이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였다.

미연도 꾸벅 인사를 하고 고수의 팔을 잡아끌어 집밖으로 나왔다.

가는 길에 장미는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미연은 두 어린 동생들과 버스를 타고 용산으로 향했다.

세사람은 일요일이라 가게문이 많이 닫혀있는 전자상가 건물안으로 들어가 조그맣게 자리잡은 한 컴퓨터 부속가게에 도달했다.

미연과 형선은 각각 필요한 부속을 샀다.

미연은 겨우 메모리 한개를 샀으나 형선은 업그레이드 할 것들을 사느라 돈을 많이 썼다.

미연은 이렇게 어린 남자들과 전자상가에 온 것이 재미있었다.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아 신선한 삶의 기운을 느꼈다.

세사람은 물건을 사들고 일단 미연의 집으로 갔다.

고수는 미연의 컴퓨터를 먼저 봐주더니 미연보고 함께 자기 집에 가자고 한다.

미연은 아침에 장미를 친정에 맡긴 참에 오랫만에 하루를 맘껏 지내보고 싶었다.

그들을 따라 고수의 집으로 갔다.

고수는 친구의 컴퓨터를 열고 안에 새로 산 부속을 끼워 넣어주고 드라이버를 깔아주었다.

미연은 고수가 그렇게 뭐든 척척 잘만지고 고치는 것이 대견해보여 옆에서 그의 모습을 흐믓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자, 잘되지?"

"야....훨씬 빨라졌네? 자식, 실력은 좋아."

"자, 그럼 이제 돈을 내셔야지. 인건비 내."

"에이, 그래. 나가자. 누님 저녁먹으러 가요."

"어, 이것이? 그냥 밥으로 때우려 드네?"

세사람은 깔깔거리며 아파트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여의도의 유흥가쪽으로 가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참, 이김에 이병문도 불러야겠다."

"군대친구?"

"응. 신길동에 살잖아. 내가 저녁 한번 사줘야하거든."하며 고수는 이병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문은 단 10분만에 고수네가 있는 식당으로 달려왔다.

네사람은 돼지갈비에 된장찌게를 시켜놓고 신이나게 먹었다.

소주를 시켜 한잔씩 따랐으나 고수는 술을 먹지 않았다.

알러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미연과 나머지 친구들은 잔을 부딪혀 건배를 하며 술을 마셨고 옆에서 고수는 상치에 고기를 얹어 자꾸만 미연의 입에 넣어 먹여주었다.

네 사람은 흥겹고 푸짐한 저녁식사를 마쳤다.

"우리 이제 뭐할까?" 형선이 물었다.

병문이 "당구나 칠까?"하고 답한다.

고수는 "그럼 포켓볼 쳐야겠네? 누나는 사구 못치잖아."

하지만 미연은 "사구도 칠 줄 알아"한다.

네 사람은 가까운 당구장으로 들어가 편을 갈라 당구를 쳤다.

고수와 한편이 된 미연은 200의 실력이었다.

남자들은 미연의 당구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고수는 미연의 오늘의 모습에서 너무나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짙게 화장한 얼굴에 짧은 치마를 입은 모습도 평소에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지만 미연의 지성미와 재능, 그리고 사교적인 모습은 여지껏 보아온 어느 여자들보다도 가장 아름다왔다.

고수의 눈빛은 점점 그녀에게 녹아들어갔다.

고수와 미연의 편이 이기면서 당구게임이 끝나자 이번에는 노래방에 가기로 했다.

미연은 너무나 즐거워 연신 깔깔 웃으며 다녔다.

결혼 후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않아 그와는 거의 아무것도 함께 즐겨본 적이 없었다.

오늘이 아마도 대학을 떠난 후 처음 있었던 가장 즐거운 외출이었을 것이다.

노래방에 들어가 각자 번갈아가며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고수는 차례가 오자 '달팽이'라는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미연은 고수가 그렇게 노래를 잘부르는 지 몰랐었다.

높은 음이 거침없이 그의 목에서 뻗어나오고 있었다.

고수는 선아와 함께 '노래하는 젊은이'라는 대학노래써클의 회원이었다.

그렇게 잘부르는 고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미연의 눈앞에는 어느덧 박영준의 모습이 떠올라 아른거렸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던 어린 모습의 박영준...

영준의 목소리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던 그 날의 그 기억이 미연에게 오랫만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고수가 노래를 마쳤는데도 미연은 그 기억에 파묻혀 멍하니 고수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고수가 자리로 돌아오자 그제서야 미연은 그의 노래를 듣다 말고 딴 생각을 한 것이 좀 미안하여 공연히 과장되게 "와아.....고수 노래 너무 잘한다....너무 멋있다~"하며 친구들에게 고수의 칭찬을 하였다.

노래방에서 나와 각자 집으로 갈 시간이었다.

"너희들은 먼저 집에 가. 나는 누나 집에 데려다주고 올께."하고 고수는 택시를 잡는 시늉을 했다.

"그래, 그럼 이따보자."

택시가 오자 고수는 미연을 얼른 택시에 태우고 자신도 옆에 올라탄다.

뒤에 남은 형선과 병문은 서로 마주보고 같은 생각을 하였다.

고수와 미연이 서로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었다.

"우린 들어가서 술 한잔 더 합시다."

"그거 좋죠."

두 사람은 집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술을 두어병 사들고 형선의 아파트로 올라갔다.

 

고수는 미연과 함께 미연의 친정집 앞까지 왔다.

"이젠 돌아가. 나 장미 데리고 집에 갈께. 고마왔어."하고 인사를 하고 미연은 친정집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방에서 나오며 "장미 자는데 그냥 두고 가라."고 한다.

미연은 알았다며 도로 밖으로 나와보니 고수가 가지 않고 그대로 서있었다.

"왜 안갔어?"

"장미는?"

"잠들었나봐. 그냥 두고 가려고."

"내가 누나 집까지 데려다 줄께. 밤길에 혼자 다니면 위험하잖아..."

"위험하긴 뭐..."하는데 고수는 벌써 미연의 집쪽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늦은 밤 골목길을 말이 없이 걸었다.

어느새 미연의 집에 도착하였다.

"정말 고마와. 그럼 내일 보자. 음...내일은 가게에서 나랑 같이 점심 시켜먹을까?"

"누나, 나...목이 좀 마른데, 물좀 줄래?"

"그래? 그럼 잠깐 들어와."

고수는 미연과 헤어지기가 싫어서 구실을 대었던 것이다.

미연은 고수를 식탁에 앉히고 찬 물을 한컵 따라 주었다.

아무리 어린 동생같은 남자였지만 밤늦게 함께 있으려니 어쩐지 무안했다.

"됐지?"하고 미연은 웃으며 돌아가라는 뜻을 보였다.

고수는 물을 마시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쪽으로 향하려다말고 다시 미연을 돌아보았다.

"누나. 나...누나 좋아해."

"호호...알아. 나두 너 좋아해."

"누나, 나 오늘 누나랑 여기 같이 있으면 안돼? 누나랑 같이 있고 싶어."

"얘는? 나랑? 어머, 내가 십년만 젊었어도..."

고수는 갑자기 미연을 꾹 껴안아버렸다.

키가 큰 고수가 너무나 꼭 껴안는 바람에 미연은 숨이 막혀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고수가 미연을 풀어주자 미연은 놀란 눈으로 고수를 올려다보았다.

고수는 아주 정색을 한 얼굴로 말을 하였다.

"누나, 나, 누나랑 오늘 같이 있고 싶어."

미연도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집에 돌아가."

"같이 있고 싶어, 누나."

"너, 나 사랑하니?"

"응....그런 거 같아."

"정말?"

"응, 정말이야. 나, 누나가 너무 좋아."

"그러면 그냥 집에 가."

"왜? 지금 같이 있고 싶은데?"

"날 생각해서 그렇게 해줘. 나 사랑한다며?"

"사랑하는데 왜?"

"네가 이러는 거, 나한테는 기분 좋은 일 아냐. 너....너같이 어리고 잘생긴 남자가 나같이 늙은 아줌마한테 이러면 내가 무슨 생각이 들거 같아?"

"무슨 생각?"

"나 이혼하고 혼자서 이렇게 산다고 그냥 그렇게 무시하고 막 대하는구나...그런 생각 들어."

"누나, 그런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지 마."

"난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러니까...너, 날 조금이라도 좋아한다면 내 입장도 생각해줘. 응?"

"뭐가 그렇게 생각이 많아? 왜 그렇게 복잡해? 누나도 나 좋아하지? 그렇다고 했지? 그럼 된 거 아냐? 내가 싫어? 나 싫어해?"

미연은 고수를 향해 올려보던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쉬었다.

"네가 싫은 게 아니구, 너를 좋아해. 하지만...이런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우린 어울리지도 않아."

"어울리질 않다니? 우리가 어때서? 누나처럼 예쁜 여자랑 나같이 멋있는 남자하고 어울리지 않으면 누가 어울려?"

미연은 웃음이 나왔다.

고수가 너무나도 어리고 철이 없어 보였다.

미연은 고수가 난처하게 굴었지만 밉지가 않았다.

미연은 고수의 두손을 꼭 잡으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네가 전에 말했었지? 모든 것을 다 겪고 나서도 여전히 사랑하는 것이 정말 사랑이라고. 우리, 조금만 기다려 볼까? 우리가 서로 진실로 사랑하는지 말야. 내가 너를 오늘 이렇게 거절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는데도 네가 여전이 나를 좋아하면...그땐 믿어줄께."

미연은 일단 고수를 돌려보내야겠다 싶어 이런 말로 그를 구슬려보았다.

고수는 그 소리에 조금 마음이 수그러졌다.

"그래. 누나 말 이해하겠어. 그럼 우리 조금만 기다려봐. 하지만 누나는 곧 알게 될거야. 내가 누나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 거."

"알았어. 이제 돌아가."

고수는 미연을 혼자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형선과 병문은 마루 소파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고수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 자식, 가더니 함흥차사네?"

"둘이 뭔일 난 거 아냐?"

"그러게...큰일 날 녀석일쎄, 참내..."

둘이서 주고받고 술잔을 기울이더니 병문은 술이 취해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고 형선은 혼자서 인터넷을 하고 놀고 있었다.

고수가 돌아왔다.

형선은 고수에게 묻는다.

"뭐야? 어디갔다 이제와?"

고수는 풀이 죽어 "응..."하고 만다.

"너, 그 누나하고 뭐했냐?"

"......"

"너 그 누나하고 사귀냐? 응?"

"....."

"너 어쩔려고 그래? 애딸린 아줌마하고....야, 임마, 정신차려."

형선이 떠드는 소리에 잠을 자고 있던 병문이 "에이 시끄러워"하며 눈을 떴다.

곧 세 사람은 소파에 앉아 고수의 사랑에 대해 토론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