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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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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사랑 25


BY 제인 2003-11-09

현주와 그렇게 이상하게 헤어진 후 고수는 그녀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축제가 낀 주말은 여느때보다도 바빠 고수와 미연은 가게에서 만나도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었다.

바쁜 한 주가 지나 다시 한가해지자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눌 수 있었다.

"축제 재미있었어?"

"뭐, 별루..."

"그 여학생은 잘 만나고?"

"관뒀어."

"벌써? 왜?"

고수는 그녀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투덜거렸다.

"너, 너무 여자맘을 모르는구나."

"내가?"

"그래. 너, 독신주의자라고 했다며, 그러고 나서 그애한테 입맞추려고하면 그 애가 무슨 생각이 들겠니?"

"무슨 생각이 드는데?"

"그냥 한번...놀아보자...그런 거 밖엔 안되잖아."

"아니, 그럼 그냥 놀려고 만나는거지, 결혼하려고 만났나?"

"여자들은 그렇지가 않아. 진지하게 생각을 해줘야지. 그렇게 막 대하면 누가 좋아해?"

"난 여자들을 이해 못하겠더라? 차만 한잔 같이 마셔도 벌써 진도가 저어만큼 나갔어. 무슨 선이라도 본 것처럼. 그리고, 입좀 맞춘다고 입술이 닳나? 키스한번하면 인생 책임져라 이거야? 쳇!"

"어휴, 너는 여자 사귀긴 틀렸다."

"그래서 나는 누나가 좋더라. 누나, 그때 그 남자, 첨 본 날 같이 잤다며?"

미연은 자신의 아팠던 옛 일을 그렇게 마구 얘기하는 고수가 원망스러워서 눈을 흘겼다.

그러면서 변명을 하였다.

"그건...좀 다른 경우지."

"그 남자 첫눈에 반했었어?"

"그런 셈이지..."

"그 남자 아직도 사랑해?"

"........"

"어? 누나, 또 대답 못하네? 벌써 두번째인데?"

'두번째인데 대답을 못하네요....두번째인데....'

미연은 그렇게 똑같이 물었던 영준의 목소리가 귀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네가 지금 한 그 말....그때 그 사람도 했었어. 그때 나는 대답을 못했었어. 남자친구를 사랑하냐고 물었는데...난 남자친구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고 있었거든. 그땐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어."

"그럼 지금 누나가 대답 못하는 건, 이젠 그 사람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잘 모르겠어. 지난번에 너한테 그 이야기를 한 다음에 생각을 해봤지.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그사람한테 반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럼?"

"아마 나는...그 사람의 목소리에 반했었던 것 같아. 그날 그의 노래를 듣고 난 그에게 빨려들어갔거든. 영혼을 빼앗기듯... 그래서 그의 아름다운 노래에 대한 선물로 나를 주었던 것 같아. 그래...선물로..."

"그래 맞아. 그 남자가 가수고 하니까 그렇게 좋아한거지. 그 남자가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좋아했겠어?"

미연은 가슴이 시큰했다.

그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슬픈 표정을 짓는다.

"누나. 이제 그 사람 사랑하지 않지? 그 사람 잊었지? 잊어야 돼. 그 사람은 벌써 누나 다 잊어버렸어."

"......?"

"나 그사람 우리학교에서 봤다. 내 써클 후배 있거든, 회화과 다니는 앤데, 유선아라고...걔랑 같이 있더라. 사귀는 거 같던데?"

"........"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여자가 많은데.... 누나, 그 사람은 누나하고 헤어지고나서 누나 벌써 다 잊어버리고 그동안 다른 여자 많이 사귀었을거야."

미연은 영준의 애원하던 슬픈 눈빛이 떠올랐다.

그와 헤어지고 흐른 시간이 벌써 8년이었다.

'그는 이제 나를...우리의 사랑을 그렇게 잊었나...? 잊었겠지...그런데 나는...나는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플까...'

미연은 알 것 같았다.

그를 사랑하냐는 고수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이유를.

그것은 그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수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가 가수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대도 그를 그렇게 좋아했을까?

나중에야 생각이 났지만,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미연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학교주변에서 명민하고 마주쳤을때 그 옆에 있었던 남자.

한 번도 눈여겨 본 적 없었던, 그저 평범한 대학생들 중 하나였던 그 남자가 갑자기 미연의 마음에 보석처럼 들어앉게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미연의 이룰 수 없었던 꿈, 그 길을 그 사람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연은 고수에게 어릴 적 이야기를 해준다.

"어릴 때, 우리 엄마 아빠가 이혼을 하셨었어. 우리 아빠는 그때 사업을 하셨었는데, 어떤 여자를 알게 되었나봐. 아빤 직장생활을 하던 우리 엄마에게 평소 불만이 많으셨대. 게다가 딸만 둘 낳고 엄마한테 아이가 안생기니까 더 불만이 많으셨나봐. 마침 그때 아빠의 사업이 많이 기울었더랬어. 그런데, 아빠는 회사가 부도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그 여자에게 다 넘겨주어버렸어. 가족관계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몰래 명의 이전을 해서 재산을 좀 남겨두려하는 거라고 엄마한테는 첨에 그렇게 말했었대. 그 사람이 그여자라는 걸 속였던 거지. 부도나면 넘어갈 건 누가봐도 명백한 우리집하고 우리집에 있던 가구들하고 그런거였어. 그런데 결국 그것이 엄마한테 위자료를 주지 않아도 되게끔 구실이 되어주었지. 아빠는 이제 명목상으로는 알거지였으니까. 아빠는 그여자랑 그 돈으로 새출발했고 ...엄마랑, 나랑, 언니랑은 그렇게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났어.

그런데 가장 가슴 아팠던 건, 집이나, 가구나, 아빠나, 화목했던 가정,...그런 것이 아니었어. 나는 그때 피아노가 있었거든. 그 피아노...너무너무 갖고 싶어서 엄마 아빠한테 졸라서 샀었던 건데...나는 어린 나이에 정말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었어. 거의 먹고 자는 시간 빼고는 그 피아노에 매달려 살았던 거 같아. 그런데 그 피아노가 없어진거야. 사람들이 와서...차압해가버렸어. 나는 그것이 가장 원망스러웠었어.

그 후로 엄마 혼자 생계를 이어가느라 힘들어하는데 피아노 레슨을 계속하겠다고 조를 수도 없고...피아노도 없어졌고...어린 나이에 벌써 인생이 싫어지더라. 그 후로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공부만 했어.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그런 대학에 들어갔지만, 정작 나는 하나도 행복하지가 않았어. 늘...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곳에 있는 그런 느낌 있잖아.

네 말이 맞는지도 몰라. 그 사람이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서 그랬던 거 같아. 그래서 그를 따라간 걸거야, 그날 밤. 그의 삶의 일부가 되고 싶어서...무의미한 나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하지만, 그를 사랑하게 된 동기가 그렇다해도 그에 대한 사랑을 부정할 수는 없잖아. ....정말로 사랑했었으니까."

"그래.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그 사람은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지. 잊어야한다는 거야. 게다가 이미 누나는 딴 남자랑 결혼해서 그 사람을 떠났었잖아. 정말로 사랑했다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미연은 너무나 적나라하게 말을 해버리는 고수에 대해 서운한 맘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맞는 말이었다.

정말로 사랑했다면...그를 떠나지 말았어야했다.

고수는 진실을, 아프지만 받아들여야한다고 미연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고수는 그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한다는 가차없는 결론을 내려주더니 화제를 바꾼다.

"누나, 이번 주 일요일날 나랑 메모리 사러 가자."

"일요일날도 열어?"

"응. 내 친구 형이 전자상가에서 컴퓨터랑 부속이랑 팔거든. 일요일날 오라고 했어."

"그래, 가자."

두 사람은 일요일에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이번에는 잊지마."하고 미연은 고수를 흘겨본다.

"윽, 저번엔 정말 미안했어. 이번엔 꼭이야. 그날 내 친구도 같이 가기로 했으니까 그런 일 없어.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