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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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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사랑 21


BY 제인 2003-11-08

"야, 고수야!"

"어, 채석아! 이 자식 살찐 거 봐."

"살 많이 쪘냐? 보기 흉하냐?"

"흉한 정도는 아니고...그래도 운동 좀 해라, 짜샤."

"어떠냐? 제대하니까 살 거 같냐?"

"말이라고 하니? 이 군대도 안갔다 온 놈아!"

"안간거냐, 못간거지? 근데, 오늘 나올 애들 있잖아...집안 빵빵하고 퀸카들이거든. 느그들 있지, 정말 잘해야돼. 삑사리 나면 나 죽는다, 알았냐?"

"삑사리 날 일이 뭐 있어? 우리 정도면 킹카 아니냐?"

"맞아, 맞아."

고교 동창생들인 친구 네명이 모여앉아 낄낄거리고 있는 동안 여자들이 몰려 들어왔다.

흐트러진 자세로 이죽거리던 남자 넷은 갑자기 긴장하여 똑바로 앉아 그녀들을 기다렸다.

가벼운 목인사를 한 여자들은 남자들의 맞은 편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안녕하세요?"

채석이 먼저 여자들에게 인사를 했다.

여자들도 고개를 까닥거리며 인사를 하더니 누가 젤 잘났나 확인하려는지 이리저리 남자 넷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서로 각자 이름과 학교, 학과를 대는 의례적인 절차를 밟았다.

여학생들은 K여대 3학년 학생들이었다.

3학년이면 이미 고학년이라고들 생각하고 있는지 그녀들은 행동거지가 제법 진지하였다.

그들은 마실 것을 시키고 나자 어떻게 짝들을 맞출가하고 의논을 하였다.

미팅을 주선한 채석은 별로 재미난 이벤트를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

싱겁게도 그냥 물건을 찾는 일로 대충 파트너를 정하고 말았다.

하지만 모두들 그 나이엔 그런 식으로 파트너를 정하는 것이 오히려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고수의 짝이 된 여학생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짝이 정해지자 파트너끼리 그 자리를 떠났다.

고수는 여학생을 데리고 주차장으로 갔다.

번쩍거리고 서있는 BMW 앞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는데 고수의 기대와는 달리 그녀는 별로 놀라지 않는 것 같았다.

고수는 '내숭을 떠는 군.'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타세요."하고 차문을 열어 태워주었다.

차를 출발시키며 고수는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글쎄요..."

고수는 이럴 때가 가장 난처하였다.

'어디로 가야하지? 남의 차 끌고 복잡한 시내로 다니기 싫은데...그렇다고 먼데 가면 기름많이 쓰고 주행올라가는데...에이, 가까운 데 가서 그냥 개기자.'

고수는 압구정동에서 벗어나지 않기로 하고 길건너 백화점이 있는 쪽으로 가서 차를 세웠다.

"어디 가는데요?"

"점심 안드실래요?"

"전 배 안고파요."

그녀는 미팅에 나오기 전에 친구들과 미리 점심을 먹고 왔다.

남자들 앞에서 허접스레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여학생들은 그런 신경까지 썼다.

고수의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고 웃음을 참으며 "그럼 먹으러 가요."하고 말했다.

"뭐 좋아하세요?"하고 고수가 물었다.

"좋아하는 거 드세요. 저는 괜찮아요."

고수는 자기만 혼자먹을 거라 생각하고 바로 눈에 띈 분식집에 들어가려다 '아니지'싶어 그 옆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메뉴판을 들고 고수는 고민이 되었다.

'비싸기만 하고 먹을 게 없네, 젠장.'

고수는 메뉴판을 뒤지다 제일 덜 느끼한 '김치볶음밥'을 한 그릇 시켰다.

그리고 여학생에게 "뭐 안시키세요?"하고 물었다.

"저는 그냥 커피 한 잔 할래요."

"아까 마셨잖아요?"

"또 마실래요."

여학생은 커피만 한 잔 시켰다.

고수는 배가 고파 허겁지겁 밥을 먹고는 물을 한잔 쭉 들이켰다.

"참, 이름이 뭐죠?"하고 고수가 여학생에게 물었다.

"이제부터 호구조사 시작하는 건가요?"하고 여학생이 받았다.

"하하하..."

"어디 사세요?"

여학생은 이름은 대답하지 않고 고수에게 어디에 사는지를 먼저 물었다.

"여의도에 사는데요."

대답을 들은 여학생은 실망스러운 편은 아니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계속 물었다.

"그럼, 고향이 서울이예요?"

"아뇨, 대구....요."

"자취하는 거예요?"

"네. 친구랑 같이..."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세요?"

고수는 속으로 '또 시작이다'하고 푸념을 한다.

"음...건축업을 하세요."

"건축회사요? 건축가세요?"

고수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집장사인 아버지가 운영하는 조그만 구멍가게는 있지만 그걸 '회사'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게다가 '건축가'라니.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얼굴로 가만히 있으니까 그녀는 다른 걸 물었다.

"아까...그 채석씨던가? 그분은 아버지가 미국에서 사업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무슨 사업을 하신대요?"

"글쎄요...저도 잘....아, 무슨 유통업을 하신다던 것 같았는데..."

고수는 더 이상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이 싫어서 포켓볼을 치러 가자고 제안을 한다.

여학생은 그러자며 따라 나섰다.

 

여학생은 이제보니 고수가 가장 좋아하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여성스러운 블라우스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었는데 다리가 늘씬하게 잘 빠졌다.

키가 큰 고수와 나란히 선 그녀의 하이힐을 신은 키가 고수와 아주 잘 어울렸다.

여학생은 큐대를 잡고 손가락을 걸어 공을 겨누었다.

하얗고 고운 손 끝의 반지르르하게 잘 다듬어진 손톱이 기다랗게 당구대에 닿았다.

고수는 그 손을 보고 한번 잡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게임을 겨우 한번 끝냈는데 여학생은 그만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저녁에 가족 회식이 있어서 일찍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가 집까지 태워드릴께요."하고 고수가 제안했다.

"저희 집, 분당이라 좀 먼데요."

"분당이 뭐 먼가요? 오랫만에 드라이브도 하고 좋죠."

고수는 여학생이 강남근처에 살 거라고 짐작을 하고 제안했는데 분당이라고 해서 사실 속으로는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런 내색없이 차문을 열고 그녀을 태웠다.

분당으로 향하는 길이 왜 이리도 긴지, 가도가도 그녀의 집은 영영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지시하는 대로 그녀의 집앞 길가에 차를 대었다.

그곳은 분당에서도 최고급 빌라 촌이었다.

궁전같은 빌라를 따라 외제승용차들이 줄줄이 서있었다.

고수는 '헉'하고 놀란다.

고수는 공주를 모시듯 그녀 쪽 차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그녀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제 전화번호 드려도 될까요?"하고 고수가 물었다.

그녀는 프라다 핸드백을 열고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고수에게 내밀었다.

고수는 자신의 번호를 입력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여학생은 빙긋 웃으며 집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