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연락이 없더니 12월 초가 되어서야 영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연은 비장한 마음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날씨가 무척 춥고 눈이 올 것 같이 흐렸다.
그녀는 하얀색 코트에 흰 모직치마, 그리고 흰부츠를 신었다.
긴 머리를 하얀 리본으로 단정하게 묶어 아주 청초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동안의 입덧과 정신적 괴로움으로 많이 야위어 있었다.
미연이 자리에 나타나자 영준은 환한 미소를 지어 그녀를 반겼다.
"그동안 좀 야윈 것 같아요. 공부하느라 힘들었어요?"
"......"
미연은 무슨 말을 해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입술을 꼭 깨물고 아무말 하지 못했다.
"내가 많이 바빠서 연락 못한 거 미안해요. 선배들이 그러는데 항상 요맘 때가 젤 바쁘다고 하더군요."
영준은 연락이 너무 늦어 미연이 좀 삐친 것이 아닌가 싶어 애써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연말에는 좀 한가해지니까....이젠 같이 지낼 시간 많을거야."하면서 몸을 낮추어 미연의 고개숙인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미연의 눈이 그의 눈과 마주쳤다.
미연은 눈길을 돌려 웨이터를 쳐다보았다.
"아, 뭐 마실래요?"
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이 좀 마시고 싶어요..."하였다.
술기운이 없이 제정신으로는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영준은 칵테일을 시켜주었다.
한 잔을 다 마시고 나자 미연의 얼굴이 발그레졌다.
빈 술잔을 만지작 거리기만 하고 미연은 아직 아무 말이 없었다.
"한 잔 더 할래요?"하고 영준이 물었다.
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잔의 칵테일이 도착하였다.
영준은 전과는 조금 다른 무거운 분위기를 느꼈다.
영준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동안 나...보고 싶었어요?"하고 물었다.
미연은 영준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계속 칵테일 잔에 얹힌 빨간 체리만 쳐다보았다.
영준은 미연의 이런 태도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는 손을 뻗어 고개숙인 미연의 앞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무슨 일 있었어요?"하고 물었다.
미연은 자기의 얼굴에 살짝 닿아있는 영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영준에게 말하였다.
"우리....이제...그만 만나요..."
영준은 깜짝 놀라며 "왜?"라고 짧게 물었다.
미연은 영준의 손을 꼭 쥐며 눈을 감았다.
영준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머뭇머뭇하더니 "나 좀 봐요...나 좀 봐요..."하며 미연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어 미연의 턱을 고였다.
미연은 두눈을 더 꼭 감았다.
눈물샘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솟아오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눈을 뜨면 눈 안에 고인 눈물이 쏟아질것만 같아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미연씨, 나 좋아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나 좋아한 거 아니었어? ....말 좀 해봐, 왜 그러는지 말 좀 해봐요....진희때문에? 그 친구하고 못헤어져서?"
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준은 한숨을 길게 쉬더니 굳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그래요? 만약 그보다 나를 먼저 만났더라면 나를 택했겠어요? 그래요? 당신 사랑은 그냥 먼저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여기까지 말하고는 몸을 뒤로 빼고 목이 탔는지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다시 애원하였다.
"난, 난, 당신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믿어. 제발 용기를 내요. 미연씨, 그러지 말고 진희에게 헤어지자고 말해요."
"너무 늦었어요..."미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눈을 떠 영준을 쳐다보았다.
눈에서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마구 쏟아져내렸다.
"...너무...늦었어요....미안해요..."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며 "사랑해요"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 카페에서 나가버렸다.
영준은 갑자기 미연이 돌아서 나가는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곧 정신을 차리고는 미연을 뒤쫓아 나갔다.
미연은 이미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