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세미나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겨 나오는 미연에게 진희는 어디가냐고 물었다.
미연은 가슴이 철렁하였다.
하지만 침착하게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고 둘러댔다.
진희는 아무 생각없이 잘 다녀오라며 친구들과 도서관으로 향하였다.
함께 있던 과친구 하나가 '바람피지 말그라~'하며 큰소리로 장난을 쳤다.
깔깔거리며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미연은 뜨끔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필 영준을 만나러 가는데 그런 소리를 듣다니.
미연은 '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거겠지.'하며 실소를 하였다.
그녀는 시계를 보면서 약속장소를 향해 서둘러 갔다.
강남에 도착할 때는 이미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영준은 미연의 모습을 보자 환한 웃음을 지었다.
미연은 긴장된 모습으로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아직 그를 대하기가 서먹서먹했다.
영준은 전에 봤을 때보다 더 멋있었다.
산뜻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이 세련되고 자신있어 보였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간이 좀 흐른 후 미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명민이하고 친한 사인가요?"
"네.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어요."
"그럼...제가 남자친구 있는 것도 알고 계시죠?"
영준은 표정이 변하였다.
서운하다는 표정이었다.
"네. 학교에서 봤어요. 두 분이서 늘 함께 다니는 거."
"결혼할 사이예요."
미연은 그 말을 꺼내고는 자기도 모르게 긴 한숨을 쉬었다.
영준은 고개를 미연쪽으로 가까이 옮기며 "나 좀 볼래요?" 하였다.
미연은 긴장한 표정으로 영준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사랑해요?"
"......"
미연은 덜덜 떨렸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미연은 곧 시선을 테이블 위로 옮겼다.
"식사 뭘로 하시겠습니까?"하는 웨이터의 목소리에 미연은 깜짝놀라 움찔하였다.
영준은 웨이터가 건네준 메뉴를 펴서 미연의 앞에 놓아주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음식을 입에 집에 넣었다.
미연은 지금 자기가 무얼 먹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뭘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영준도 어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여지껏 여자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미연을 짝사랑해온 것이 전부였다.
그는 대학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스튜디오에서 노래연습으로 보내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곡을 만드는 일로 보내왔다.
가끔 학교에 갈 때면 미연을 혹시나 볼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갔고, 그녀의 모습을 보는 날은 정말 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전부였다.
서먹서먹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자 영준은 분위기를 바꿔봐야 할 것 같았다.
"우리 자리 옮길까요? 맥주 마실래요?"
"그래요."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서 나와 멀리도 아니고 바로 옆 카페로 갔다.
어두운 조명의 실내가 무척 아늑한 곳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마주 앉았다.
영준의 눈에는 미연의 긴장한 듯 상기된 얼굴이 너무나도 예쁘게 보였다.
그냥 이렇게 아무말 한마디 안해도 너무나 좋았다.
그녀의 얼굴을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것이 꿈만 같았다.
한참 후 영준은 아까 물어본 것을 또 다시 물었다.
"그 사람...정말 사랑하세요?"
"......."
"두번 째인데 대답을 못하네요."
"오래 사귀었어요. 1학년때부터..."
"오래 사귄다고 사랑하게 되는 거 아니죠."
미연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영준은 미연의 맥주병을 붙들고 있는 두 손을 포개어 잡았다.
"저도 그 사람만큼 미연씨 곁에 오래 있었어요."
미연은 무슨 소린가 하고 영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 사람보다도 제가 미연씨 훨씬 더 많이 사랑하는지 몰라요."
그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노래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렸다.
미연은 그의 이야기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지난 밤 그의 차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와 어디든 아주 먼 곳으로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 날 두 사람은 별로 말이 없는 데이트를 하고 헤어졌다.
다음에 또 언제 만날지 기약도 하지 않았다.
영준은 요즘 스케줄이 일정치가 않아 언제 만나자고 정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또 전화하겠다는 말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영준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미연은 '영준은 지금 나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도저히 진희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더우기 지금 함께 수업을 듣고 있는 중에 그런 소리를 하면 학업에도 지장이 올 것 같아 더 조심스러웠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이번 학기 끝나고 새 학기 등록하기 전에 그에게 이야기를 하자...헤어지자고...서로 수업을 비껴들으면서 마주칠 기회를 안 만들면 그래도 나을테니까...'
미연은 아무도 모르게 이런 결심을 굳혀가고 있었다.
영준에게서 전화가 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열흘 쯤 후였다.
"너무 바빴어요. 여기저기 하고 다니는 일이 좀 많아서..."
"저번 음반은 반응이 어땠어요? 제가 듣기엔 정말 좋던데...저...그거 들어보고 싶어서 하나 샀어요."
영준은 너무나도 기뻤다.
미연이 자신에게 그렇게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믿어지질 않았다.
"저한테 말씀하지 그랬어요. 하나 드릴껄..."
"괜찮아요."
두 사람은 음악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미연도 음악을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음악이야기를 시작하자 두 사람은 대화가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엄마의 영향으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자라면서 클래식과 팝과 그리고 영국의 락음악까지 섭렵했다는 그런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는데, 두 사람은 거의 비슷한 음악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미연도, 영준도,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은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영준은 오늘 미연이 지난 번에 비해 훨씬 덜 긴장하고 이야기를 서슴없이 잘 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기뻤다.
이젠 그녀가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고 내게만 와준다면 영원히 내 곁에 두고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그런 다짐을 매 순간순간 하고 있었다.
영준은 미연을 차에 태워 집으로 데려다 주고 싶었지만 미연은 거절하였다.
주변에서 알게 될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녀의 그런 조심스러운 마음을 읽고 그냥 혼자 돌아가도록 보내주었다.
영준은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워 미연의 생각으로 싱글벙글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요즘처럼 행복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하루라도 빨리 진희와 헤어지기만을 바랐다.
그녀가 자기에게 오면 곧 결혼식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