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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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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사랑 14


BY 제인 2003-11-05

어제는 술기운에 그렇게도 당당하게 일을 저질렀건만 아침이 되니 미연은 자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어 마음이 심란했다.

부도덕한 짓을 저질렀다는 그런 죄책감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미연의 마음에 영준의 존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단 하루밤의 만남이었지만 진희와의 5년 세월동안 쌓아왔던 정보다도 훴씬 더 크고 진한 애정을 느꼈던 것이다.

이런 감정을 감당하기가 힘들어 하루종일 이불 속에서 뒤척였다.

저녁녘이 되어 진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너도 오늘 학교 안갔다며?"

"응."

"너도 어제 많이 취했었냐? 아이, 난 너무 마셔서 여태까지 일어나지도 못했어. 애들한테 수업 어떻게 되었냐고 전화했더니 애들이 많이 빠져서 취소됐다던데? 너도 학교 안나오고..."
"응."

"몸이 아직도 안좋냐? 그럼 쉬어. 그리고 내일 만나."

"왜?"

"왜는 뭐가 왜야? 세미나 준비해야지. 내일 도서관으로 나와."

"알았어."

미연은 전화를 끊었다.

저 남자 목소리는 왜 저렇게 멋대가리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준의 노래부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젯밤 함께 지내며 들었던 그의 목소리...떨리는 듯, 수줍은 듯, 조용조용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언저리에서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영준의 생각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미연은 저녁도 먹지않고 그대로 잠을 자버렸다.

 

다음날 도서관에 나가 친구들과 분담하여 자료를 수집하며 세미나준비를 하였다.

세미나 준비가 끝나자 진희는 미연에게 함께 자기집에 가자고 하였다.

미연도 진희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아서 그러자고 했다.

두 사람은 저녁거리를 사들고 진희의 자취방으로 가 저녁을 해 먹었다.

지방 출신인 진희는 고교시절부터 서울에 유학 와 혼자 자취를 하며 살아왔다.

미연과 진희는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이 자취방을 함께 드나들며 사실혼 관계를 가져왔다.

그래서 굳이 결혼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아도 서로가 결혼할 사이임을 기정사실화 해왔던 것이다.

미연이 저녁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진희는 소파에 걸터 앉아 저녁뉴스를 보고 있었다.

미연은 밥을 앉히고 찌개를 끓이는데 머리속에서 자꾸만 이런 생각이 솟아났다.

'우리 헤어져, 진희야...이제 우리 그만 헤어지자...'

오늘이 가기 전에 꼭 이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진희가 뭐라고 할지가 두려웠다.

밥상에 마주앉아 밥을 먹으면서 미연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술이 아직도 안깼어?"하고 진희가 물었다.

"엉? 아냐...그냥...감기기운인가봐."

진희는 멋대가리 없이 물어보더니 미연의 대답엔 관심이 없는 듯 다시 밥을 먹었다.

그러면서 눈길을 계속 틀어놓은 TV로 돌리고 있었다.

그는 밥을 다 먹고 나서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웠다.

이야기를 꺼낼 분위기를 찾지 못한 미연은 그릇을 치우면서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가기 전에 헤어지고 싶다는 뜻을 조금이라도 비추고 싶었다.

갑자기 폭탄선언하는 것보다는 마음을 조금씩 천천히 알려서 자연스럽게 헤어지고 싶었다.

설겆이를 하고 수건에다 손의 물기를 닦은 후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진희 옆에 슬쩍 다가가 앉았다.

"있지..."

헌데 진희는 "응?"하더니 미연이 이야기를 채 꺼내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미연을 끌어 안았다.

그리고 덥썩 소파위에 눕히며 애무를 하기 시작했다.

"잠깐만, 저기..."

"가만히 있어봐."

이런 일은 너무나 계속 똑같이 반복되어 왔었다.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때 진희의 자취방인 이곳에 처음 놀러와 사랑놀음을 시작한 이후로 그저 똑같이 이렇게 저녁을 해주고, 그동안 쌓였던 그릇을 치워주고, 그리고 이렇게 그의 사랑이 되어주었다.

미연은 이 날도 그냥 그렇게 얼렁뚱땅 진희의 상대가 되어주고 말았다.

미연은 차라리 진희가 빨리 끝내기를 기다렸다.

진희가 일어나 주섬거리고 있을때 미연에게서는 깊은 한숨이 몰려나왔다.

"미연아, 너 몸이 정말 안좋은 거 같다, 자꾸 한숨쉬고? 집에 가서 쉴래?"

"저, 우리..."

"머?"

"저..."

미연은 이제 그만 헤어지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바깥으로 꺼내지를 못하였다.

"알아, 네맘. 우리 있지, 이번 학기 끝내고 약혼식 올릴까? 집에서도 자꾸 결혼하라고 그러긴 하는데, 지금 공부하다 말고 결혼할 수는 없잖아."

진희는 전혀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미연은 그냥 코트를 들고 일어서서 집으로 가겠다고 하며 나왔다.

진희도 뒤따라나와 정류장까지 전송하였다.

진희는 "조금만 참고 기다려, 응?"하고 미연을 위로한답시고 다시금 다짐을 해주었다.

'진희는 저렇게 철석같이 나를 믿고 있는데, 내가 왜 이러지? 내가 나쁜 사람일까? 내가 미친 걸까?....맞아, 내가 미친거야. 이러면 안되는데...'

미연은 돌아가는 차창에 기대어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자신을 원망하였다.

미연이 집으로 돌아오니 밤 10시가 다 되었다.

옷을 갈아입는데 엄마가 전화가 왔다며 수화기를 미연의 방으로 가져왔다.

"누구야"하고 묻는데 엄마는 모르겠다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가버렸다.

"여보세요."

"미연씨, 저...박영준인데요."

미연은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하고 책상의자에 주저 앉았다.

침을 꿀꺽 삼키고는 "네."하고 간신히 대답하였다.

"만나고 싶은데...내일 시간 있으세요?"

"내일..."

미연은 내일 무슨 다른 약속이 없었나하고 머릿속으로 재빨리 생각해보았다.

"내일...괜찮아요. 오후에 세미나 있는 거 말고는..."

"그럼 제가 끝나는 시간에 학교 앞으로 갈까요?"

"아뇨, 제가 그쪽으로 갈께요. 어디로 가야하는지..."

"음....강남역 사거리에 황실이라는 레스토랑이 있거든요. 거기서 만날까요?"

"그래요, 그리 갈께요."

미연은 가슴이 뛰었다.

데이트 신청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거였나보다.

같은 과 친구인 진희와 사귀면서 미연은 그 흔한 미팅 한번 해본 적이 없었다.

이성과의 이런 설레는 약속은 처음인 것 같았다.

진희를 생각하면 이래서는 안되는데도, 왜 영준의 목소리가 이렇게도 반가운 것인지, 미연은 이런 기쁜 감정이 솟아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미연은 잠이 오질 않았다.

진희와의 관계를 끝맺지 못하고 자꾸 영준에게로 끌려가선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와의 만남에 가슴이 설레이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