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은 선물가게에서의 바빴던 첫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도중 괴로왔던 이혼 당시의 일이 떠올라 기운이 한층 더 쭉 빠졌다.
힘없이 터벅거리며 장미를 맡겨놓은 집근처 친정집을 향해 걸었다.
어둠속에 멀리 어린 아이의 모습이 아른거리나 싶더니 "엄마!"하며 장미가 달려왔다.
"추운데 왜 밖에 나와 있어?"
"엄마 보고 싶어서."
"그랬어? 엄마도 장미 보고싶었는데."
미연은 장미의 볼에다 입을 맞추고는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미연의 친정 엄마가 반가이 맞으며 저녁상을 차려주겠다고 분주히 움직였다.
방안에 들어섰더니 미연의 언니와 두 어린 조카들이 단칸 방의 아랫목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미연의 언니는 미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슬쩍 한번 웃어보이고는 다시 시선을 TV로 돌린다.
엄마는 저녁상을 들고 들어와 미연과 장미의 앞에 놓으며 물었다.
"어땠니? 힘들던?"
"아니, 아무것도 아니던데 뭐. 재미도 있고."
"다행이다. 그래 얼마나 준다냐?"
"나 그냥 월급으로 준대. 그래서 지난 번만큼 받을 거 같아. 그리고 매일 아침 9시부터 5시까지 일하고 토요일은 오후에 하기로 했어."
"일요일은?"
"닫어."
"에구, 일요일날은 쉬어서 다행이다."
"그럼, 장미 두고 어떻게 맨날 일을 해."
"왜 저번 클럽인가 거기서 일할 땐 일요일도 나갔었잖아. 게다가 밤늦게까지 일하구. 이젠 시간이 그래서 정말 잘 됐다."
"그대신 그땐 평일날 놀았었잖아. 그리고 그땐 장미도 어렸구. 이젠 학교 다니니까 안돼지, 숙제도 봐주고 그래야하는데. 정말 시간이 참 맘에 들어. 그 주인이 아주 잘해주더라구."
"그래, 애비도 없는데 엄마가 저녁도 같이 먹어주고 그래야지, 엄마마저 늦게 오고 그러면 어쩌니."
미연의 엄마는 밥을 먹고 있는 장미를 내려다보며 "아빠 보고싶니?"하고 묻는다.
미연은 장미의 눈치를 본다.
장미는 밥을 먹다말고 눈을 똘망거리며 할머니를 올려다본다.
"할머니, 나 아빠 없어도 돼."
"뭐?"
"아빠 없어도 괜찮아."
"어머 얘가?"
"나 아빠 하나도 안보고 싶어."
그러더니 장미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계속 밥을 먹는다.
"아빠한테 별로 정이 없었잖아. 맨날 새벽에 나갔다 새벽에 들어왔으니 무슨 정이 들었겠어?"
"에그, 그나마 딸네미라 다행이다. 아들같았어봐라, 그냥 두고 갔겠니? 삼대 독자에 대 이어야 하는데?"
"아들이라도 안데려 갔을거야."
미연은 남편이 자신을 너무나 미워한 나머지 딸인 장미조차도 예뻐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미가 아들이었다 해도 데려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미연의 엄마는 미연과 장미가 마주앉아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옆에서 안스럽게 바라보고 있다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괘씸한 놈. 괘씸해. 어쩜 그래? 생각할 수록 괘씸해 죽겠네. 지 자식을 이렇게 내버려두고 어떻게 그래 위자료는 커녕 양육비 한 푼 주지도 않고 그렇게 쏙 달아나? 괘씸한 놈 같으니라구..."
"그런 거 줄 형편 아니었잖아."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그럴 형편이 아닌데 그래 유학을 가? 이 바보야, 니가 속은 거야. 니가 그렇게 어리숙하니까 그 놈이 돈주기 싫던 차에 불쌍한 척해서 널 이용해 먹은 거지. 에그, 이 바보야, 너 니 애비 하는 거 보고도 모르냐?"
"다 지난 얘기 하면 뭐해?"
"적어도 전세 뺀 거 정도는 달라고 했어야지, 그냥 이렇게 알거지로 쫓겨나?"
"쫓겨나긴 누가 쫓겨났다구 그래?"
"그럼 이게 뭐냐? 애하고 둘이 어떻게 먹고 살라고...에이...쯧"
미연은 이혼하면서 위자료를 요구하지 않았다.
남편의 퇴직금과 전세금을 고스란히 모두 그에게 주어버렸다.
그의 처지에 그거라도 있어야 재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또 한편 미연의 마음 속에는 남편에 대한 깊은 죄책감이 있었다.
그에게 한푼의 위자료도 원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대로 그렇게 그를 떠나보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미연은 더이상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다.
서둘러 밥을 다 먹고는 일어서서 상을 집어드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미연의 엄마는 "그냥 둬, 하루종일 일하다 왔는데."하며 미연을 말렸다.
"아냐, 내가 치우고 갈께."
"글쎄 그냥 둬. 난 하루종일 집에서 노는데 이깟 상치우는 거야 내가 하지. 넌 어서 장미 데리고 가서 쉬어라. 피곤할텐데."
"알았어, 그럼..."
"내일도 내가 학교끝나면 장미 데리고 와있을테니 걱정말구."
"응. 고마와 엄마."
미연은 장미를 데리고 친정집에서 나와 나란히 걸으면서 자기 집안의 처지에 실소를 한다.
미연의 엄마도 미연이 어릴 적에 아버지와 헤어져 혼자가 되었다.
얼마 전에는 언니마저도 이혼을 하고 말았다.
이런 걸 보고 집안 내력이라고 하나.
미연의 아버지는 딴 살림이 나서 엄마와 이혼을 하였는데, 그때 위자료를 한푼도 주지 않았다.
위자료 때문에 엄마와 싸우던 아버지가 '아들도 못낳는 주제에 무슨 말이 많아?'하고 호통치던 소리를 아직도 미연은 기억하고 있다.
미연의 엄마도 미연처럼 그렇게 위자료도 없이 이혼한 후 혼자서 두 딸을 키우느라 무척 고생을 하였다.
그래도 엄마가 계속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두 딸을 대학공부까지 시킬 수가 있었다.
몇해전 정년퇴직하여 홀가분하게 말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만 두 딸이 연이어 이혼을 하는 바람에 양쪽 외손주 돌보느라 다시 바빠지셨다.
그래도 엄마는 아이보는 일이 재미있다며 기꺼이 아이들을 맡아주셨다.
미연은 어려운 결손가정에서 자라 마음 고생이 많았던 어린 시절을 장미에게 대물림하는 것이 아닐까 늘 마음이 불안했다.
장미가 아빠를 찾지 않고 엄마랑 단 둘이 사는 것을 좋아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