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상담은 나혼자 갑니다. 이수아씨는 여기서 퇴근해요."
진영은 수아를 두고 혼자 차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수아는 집으로 들어갈까하다 헬스클럽에 가기로 했다.
-머리가 복잡할때는 몸을 쓰는게 최고지.
다음 날 여덟 시가 다 되도록 진영의 출근이 늦어지고 있었다.
수아는 어제 일이 불안해 자꾸 벽시계를 쳐다본다.
"선배님 굿모닝!"
여직원이었다.
"어, 지은씨. 일찍 출근하네."
"커피 드셨어요?"
"아직, 지은씨 커피 마실래?"
"어 선배님 제가 탈께요."
"아냐, 어떻게 마셔?"
"전 커피믹스마시는데."
수아는 커피 두 잔을 들고 소파에 앉는다.
"이사님 출근 늦는다고 하셨어?"
"아뇨? 어제 선배님이랑 같이 퇴근하신거 아녜요?"
"저녁 약속은 혼자 가셨어."
"뭐 오시겠죠. 이사님 되게 무뚝뚝하죠?"
"무뚝뚝? 너무 관대한 표현이다. 영하 20도야. 한여름에 얼어죽겠다구."
"크크크, 맞아요, 우리 이사님 유명하죠."
"근데 저렇게 냉정한 사람한테 왜 고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거야?"
"뭐, 업무가 그렇다보니 쓸데없이 말 많지않고 말 옮길 것 같지 않으니까 그런거 아니겠어요? 더군다나 학벌에 경력에 화려하시잖아요."
"하긴...융통성도 없더라구."
"이 일이 고객정보라도 유출시키는 날에는 소문이 일파만파, 그날로 문닫는 거죠, 뭐."
지은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제 일이 더욱 걱정되는 수아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진영의 행보에 흥미로워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참, 이사님 나이가 어떻게 돼?"
"음...호적상으로는 서른 일곱으로 알고 있어요."
"어머, 많이도 먹었다."
하하하...여직원의 웃음꽃피는 사무실에 영하20도의 진영이 들어섰다.
-하필이면 이때 날 얼마나 허접하게 보겠어. 어제 그런 일도 다 보고 정신없는 여자라 생각하겠지.
"이수아씨 잠시 들어오세요."
수아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진 채 진영의 방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어제 뵌 신회장님한테 전화가 올 지 모릅니다. 이수아씨를 찾을 지도 몰라요. 지은씨한테 누가 이수아씨 핸드폰 번호를 물어보거든 가르쳐 주지 말라고 당부하고, 일주일간 저와 지방 출장을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입사 하자마자 긴 출장 부담스럽겠지만 준비하세요. 일단 집에 가서...아니군...같이 나갑시다."
어리둥절한 수아가 진영을 따라나선다.
"지은씨, 혹시 전화오면 나랑 이수아씨 지방으로 일주일간 출장 갔다고 전해주고 기업체 연수가 아니라서 어디로 갔는지 정확히 모른다 하세요. 그리고 혹시라도 이수아씨 연락처 묻는 전화오거든...음..그런 사람 없다고 하세요."
지은의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수아에게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묻는다.
수아는 자신도 무슨 일인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올라가서 간단하게 챙겨 내려와요."
수아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일주일 출장을 다닌 적이 없었다.
허둥지둥 속옷과 화장품 블라우스와 정장 두 벌을 챙겨 내려왔다.
수아를 태운 진영은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 이사님, 어디로 가시는 거에요? 혹시 어제 그 일 때문에 잠적이라도 하는 건가요? 저까지 이렇게 잠적할 일 있을까요?"
"첩보영화 찍습니까?"
- 헉...
"일주일동안 연수원 강의가 있어요. 다섯 군데에서 강의를 해야합니다. 다른 지역들이라 이게 편할 겁니다."
수아는 어제 일이 어떻게 끝났는지 너무 궁금했지만 진영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뻔할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저, 운전하시다가 음악 안들으세요?"
말없이 멀뚱하게 가는 것이 멋젂은 수아가 물었다.
"카오디오 고장났습니다."
-참내...새 차 오디오가 고장? 내꺼 듣는다, 관두셔.
수아는 mp3를 꺼내 이어폰을 켰다.
The lights in the harbor don't shine for me
I'm like a lost ship lost on the sea
The sea of heartbreak
Lost love and loneliness
Memories of your caress, so divine
I wish you were mine again, my dear
I'm on a sea of tears
Sea of heartbreak
Now how did I lose you, Where did I fail
Why did you leave me always to sail
The sea of heartbreak
oh what I'd give to sail back to shore
Back to your arms once more
So come to my rescue, Come here to me
Take me and keep me away from the sea
Sea of heartbreak
on the sea of heartbreak
I'm drowning in a sea of heartbreak
저 항구의 불빛 날 위해 빛나지 않아요
난 바다에서 길 잃고 떠도는 외로운 배
상심의 바다에서
사랑 잃고 외로움만 남아
당신 손길 그 소중한 추억 잊지 못해요
다시 내 사랑 되어주지 않겠어요
나는 눈물의 바다에서 떠돌고 있어요
상심의 바다에서
어떻게 당신을 잃게 되었죠, 내가 뭘 잘못 했나요
당신은 왜 나를 한없이 떠돌게 두었나요
상심의 바다에서
오 어떡해야 할까요, 해안으로 돌아가
다시 당신의 품에 안길 수 있으려면
어서 와 날 구해 줘요, 내게로 와요
날 데려가 이젠 떠돌지 않도록 해 줘요
상심의 바다에서
상심의 바다에서
상심의 바다에서 난 빠져죽고 있어요
수아가 중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노래였다.
멜로디가 좋아서 듣기 시작한 노래가 서른이 다 된 수아의 처지와 같을 줄이야...
눈감고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수아를 진영이 잘 논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저 음악을 저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따라 부르는 여자인 걸 보니 실연 따위는 당해 보지 않았거나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 본 숙맥이라는 생각이 드는 진영이었다.
게다가 보기 드문 음치아닌가.
당장 그만두라고 하고 싶지만 틀린 음정으로 열심히 따라하는 수아가 재미있기도 했다.
클라이막스에서는 정말 가관이었다.
"이수아씨, 그만 일어납시다."
수아의 목이 꺾여 그대로 창밖에 떨어질 상태였다.
화들짝 놀란 수아는 배시시 웃어 보이고는 주위를 둘어봤다.
너무 근사한 연수원이었다.
"어머나, 너무 좋은 곳이네요. 이 공기 맑은 것 좀 보세요."
"이수아씨, 제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저와 다니는 곳 지리를 잘 알아두라고. 제가 이수아씨 기삽니까?"
수아는 또 배시시 웃는다.
-이제 이사님한테는 그냥 웃지요 할거에요.
진영이 총총 내리는 수아를 황당하게 바라본다.
"이수아씨 놀러왔어요?"
진영이 내릴 생각을 하지 않자 수아도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차에 오른다.
"강의시간까지 30분 남았습니다. 10분전에 들어갑니다."
"그럼 20분 동안 뭐 하죠? 이사님?"
"앉아서 공부하세요."
-헉...내 책...
"안가져 왔습니까?"
"...예, 너무 갑자기 준비하라고 하셔서..."
"그럼 일주일동안 남는 시간 뭐 할겁니까?"
-남이사...밀린 잠 잘꺼다
"죄송합니다. 어떡하죠?"
"일주일 간 강의 스케줄입니다. 참고하세요."
진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운전석을 뒤로 젖힌다.
진영은 누워있고 수아는 앉아있는 꼴이 되었다.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차에서 뭐하자는 건지...
수아는 다시 mp3를 켰다.
흥얼거리는 수아...
"이수아씨!"
"네?"
"그냥 음악만 들읍시다."
-뭔소리야?...어머나! 내가 따라불렀나봐. 미쳤어, 미쳤어.
강의실에는 시커먼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들이 꽉 차 있었다.
여자는 수아 혼자였다.
진영과 수아가 들어서자 남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쯧쯧...군인들도 아니고...
수아는 맨 뒷좌석에 앉았다.
강의는 두 시간동안 진행되었다.
금융기관 사원들을 상대로 하는 강의라 너무 전문적이고 고리타분한 내용이라 수아는 졸다가 자다가를 반복했다.
우뢰같은 박수소리에 놀란 수아가 벌떡 일어났다가 진영과 눈이 마주쳤다.
"본 강의는 여기서 마치고 질문 있으면 받겠습니다."
몇 차례 질의응답이 오가고 강의는 끝났다.
진영은 책임자와 인사를 나누고 수아를 소개했다.
앞으로 수아를 통해 강의 스케줄을 잡으라는 진영의 말에 담당자가 잘 부탁드린다는 악수를 청했다.
"아까 담당자 말인데요, 왜 저한테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죠? 우리야 불러줘야 고마운거 아닌가요?"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강의스케줄 잡지 않도록 해요. 물론 결정은 내가 하지만 거절은 이수아씨가 적당히 둘러대야 합니다."
"강의하는 거 싫어하세요?"
"..."
"그럼 안하시면 되잖아요. 상담때문에도 바쁘신데..."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강의도 있고, VIP들 부탁으로 어쩔수 없이 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수아씨는 평소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삽니까?"
-꼭 말을 해도...
수아는 아까 받았던 스케줄을 읽어보았다.
-한양그룹 신입사원 자산관리 강의?
수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성호가 다니는 회사였다.
토요일 오전 강의였다. 내일이다.
수아는 멍하게 창밖만 내다본다.
진영은 내일 오전 강의를 위해 한양그룹 연수원으로 향했다.
"저...이사님."
"?"
"혹시 오늘 저녁 한양그룹 연수원에서 묵는 건가요?"
"네"
진영은 안절부절하는 수아 표정을 읽는다.
"뭐 잘못 된 거 있습니까?"
"...저 죄송하지만 저는 근처 모텔같은데서 묵으면 안될까요?"
"만나면 안되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수아 얼굴에서 불안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
"저녁부터 먹읍시다."
내내 배시시 웃던 수아의 얼굴이 풀어질 줄 모른다.
"앞에 같이 먹는 사람 생각도 합시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식사 안할껍니까?"
"아...네...죄송해요. 드세요."
그제서야 생각에서 깨어 난 수아가 숟가락을 든다.
"저 신입사원이라면 올해 입사한 사람들인가요?"
"그렇겠지요."
수아는 천천히 밥을 먹다 진영이 식사를 마치자 숟가락을 놓았다.
"전 저기서 묵을께요."
수아가 궁전처럼 지어진 모텔을 가르키자 진영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주차장에 차를 댔다.
"저 혼자 들어갈테니까 이사님은 연수원에 가서 주무세요."
"내일 나보고 이수아씨를 데리러 오라는 소립니까?"
진영이 뚜벅뚜벅 모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두개 주십시오."
카운터에 있던 어린 남자가 로비에 멍하게 서있는 수아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수아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내일이면 성호를 만날 지도 모른다.
진영은 멍한 상태로 있는 수아의 손목을 잡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진영을 따라 방 문앞에 섰다.
"방문 잘 잠그고 자요. 내일 열 시 강의니까 여덟 시쯤에는 일어나야 할 껍니다."
"네, 이사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어깨가 축 늘어진 수아가 트렁크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진영은 안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듣자 옆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렇게 빨리 성호와 만나게 될 지 몰랐다.
수아는 성호를 보지 못해도 성호는 수아를 보게 될 것이다.
성호가 나와서 아는 척을 할까? 아는 척을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수아는 일본에 있는 선배까지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동이 틀 무렵 깜박 잠든 수아는 핸드폰 소리에 놀라 일어났다.
"30분이면 준비 끝나겠습니까?"
진영이었다.
"아, 네, 이사님.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수아는 정신없이 샤워를 하고, 드라이를 하고 화장을 했다.
"오늘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할 껍니까?"
"아..아니에요."
수아는 명치가 답답해 지는 것을 느끼며 꾸역꾸역 밥을 밀어넣었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가고 있음을 느낀다.
"서두릅시다."
진영은 계산을 하고 먼저 나갔다.
수아는 거울을 보았다.
바보처럼 멍청한 표정의 여자가 있다.
립스틱을 바르고 호흡을 고른다.
어차피 살다가 한 번은 마주칠 거라 예상했다.
그 날이 조금 일찍 온 것 뿐이다.
-이수아, 만나면 그냥 미소 한 번 날려주면 되는 거야. 이것 저것 말 시키려 하면 그냥 손 한 번 흔들어 주고 오면 되는 거야.
"보기 껄끄러운 사람 있으면 안들어와도 됩니다. 차에서 눈 좀 붙이고 있던지."
-얼굴에 써있나?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들어가세요."
수아가 먼저 내렸다.
진영은 수아를 한 번 쳐다보더니 성큼성큼 연수원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