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몇 일간 계속해서 비가 내릴 것 같다는 예보다.
10년간 상상속에서 키워왔던 사랑을 정리하는 아주 괜찮은 비가 내려주면 좋을텐데...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내리는 비는 반갑지 않다.
정리하는 사랑을 위해서 한 이틀만 내려주고, 새로 시작하는 사랑을 위해 따사로운 햇살과 뽀송뽀송한 바람이 불어줘야 하겠다.
수아는 입지도 않고 쳐박아둔 옷들을 한보따리 정리하고 일년넘게 신발장 신세를 못면했던 신발도 모두 정리한다.
새로 시작하는 사랑을 맞이하는 최소한의 준비랄까, 10년간 써왔던 보내지 못한 편지와 일본에 살고 있는 '그'의 연락처, '그'에게 받은 자질구레한 선물들을 모두 박스에 담아 문앞에 쌓아놓았다.
10년간 사랑을 외면했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사랑을 받아들여, 드디어 즐거운 나의 집을 이루는 상상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날이다.
가끔 수아는 그녀 일방적 사랑이 정말 사랑일까 하는 고민에도 빠져봤다.
가져보지 못한 것에 대한 간절한 집착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에야 편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첫사랑이라 기억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내일 모레면 서른인 여자가 사랑 한 번 못해봤데서야 너무 우울한 청춘이 아닌가.
어떤 누구를 만나 '그'를 생각하지 않고 즐거운 시간을 단 1시간이라도 보낸다면 '그'를 잊을 자신이 생길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먹고 연애를 해도, 상대가 분위기 잡고 뽀뽀라도 할라치면 든다는 생각이
"만약 내 운명의 남자가 이 사람이 아니고 '그'라면...내가 좀 더 기다리지 않고 방정을 떠는 탓에 운명이 비껴가는 것은 아닐까?"
였다.
이 생각 덕분에 수아는 서른 가까이 나이를 먹고도 그 흔한 뽀뽀 한 번 못해봤다...
정말 친한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하느님과 나만 아는 비밀이었다.
하느님도 그렇다.
정말 '그'가 내 운명이 아니라면 10년간 정리안되었던 이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던 거냐고.
이젠 운명따위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살다보니까 미적미적 결론 못내는 우유부단한 성격과, 강하게 밀어부치지 못하는 소심함, 한 번 실패에 바로 주저앉아버리는 끈기없는 그녀로서는 비껴가는 운명을 잡아챌 가능성이 희박할테니까...
-그래서...나도 이제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늘 청바지에 점퍼차림으로 만났던 성호를 만나러 간다.
오늘은 너의 사랑을 받아주련다.
애초에 타고나기를 간지럼에 약해서인지 스킨쉽을 싫어하던 그녀였지만 1년 가까이 성호를 만나면서 자연스레 손도 잡고 다녔고, 성호가 어깨에 손을 올릴때도, 껴안고 이마를 부벼올때도 큰 거부감이 없던 걸 보면 그녀 역시 성호를 좋아하는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1년 동안 이렇다 할 고백은 듣지 못했지만, 그녀가 10년간 짝사랑한 '그'에 대해 알고 있던 성호는 아마도 그녀가 마음을 정리할 때 까지 기다리는 듯 했다.
1년 전, 영어스터디에서 만난 성호는 취업준비를 준비하던 졸업반이었다.
말도 제일 잘 통했고, 스스럼 없는 스킨쉽과 자상한 배려에 단 둘이 술도 자주 먹고, 수아의 짝사랑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얘기하던 터였다.
스터디에 있던 친구나 선후배들도 성호가 너에게 마음이 있는것 같으니 한번 사귀어보라는 충고도 해주었고, 대기업에 취직한 성호는 그녀가 보기에도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서른을 바라보고 있는 이 여름에, 아무리 생각해도 성호를 놓치면 다신 이렇게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도 생겼다.
차려놓은 밥상에 앉아, 쥐어주는 숟가락만 들고 떠먹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다.
'그'에게 성호와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도 싶고, 어쨌든 '그'보다 먼저 결혼하고 먼저 행복하고 먼저 아이를 낳야 겠다는 전의가 새삼 들었다.
옷장을 뒤져 화사한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결혼식 전용의상인 이 원피스를 입는 것을 성호는 좋아했다.
오늘부터 비가 온다기에 어제 굵은 웨이브로 퍼머도 했다.
이제 마음이 정리되었으니 한 번 사귀어보자는 말을 꺼내기 위해선 좀더 청순하고 여린 모습을 보여줘야 겠기에 어제 한 퍼머머리를 하나로 묶어 하얀 목선이 드러나게 연출을 했다.
발목이 갸날퍼보이는 굽있는 샌들과 핑크톤으로 옅은 화장도 했다.
전신거울에 비친 모습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뭐 그다지 출중한 미모는 아니지만 빠지는 각선미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남자들을 홀리는 목선이 있다.
약속장소인 카페에 도착하자 문앞에 성호가 서있었다.
"드라이브나 가자."
성호는 손목을 끌어당겨 길가에 대놓은 차로 데려갔다.
"어? 왠 자동차?"
새로 뽑은 듯 맨질맨질한 광택에 흰색 승용차였다.
"오늘 나왔다. 뜨끈뜨끈한 새 차다. 시승식하자."
차 안은 새 차에서 나는 약간 비릿한 시트 냄새와 방향제 향기가 섞여 살짝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결혼식 있었어?"
성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원피스를 슬쩍 쳐다본다.
"아니..."
"근데 왠일로 그런 옷을 입었어? 다른 약속 또 있니?"
"어디로 갈꺼야?"
쑥스럽고 당황스런 그녀는 얼른 화제를 돌려본다.
"글쎄...우리 양수리 한번 갔다 올까? 시간 괜찮으면?"
"그래"
10분 정도 달리고 나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성호가 먼저 대시를 하면 나도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의 존재때문일까 성호는 한번도 진지하게 우리의 만남에 대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 그 사람 잊기로 했어.
이렇게 얘기하면 성호가 자연스럽게 고백을 하지 않을까? 아니면
-이제 우리 정식으로 연애해 볼까?
이렇게 정공법을 써볼까.
아휴, 그냥 친구들한테 슬쩍 얘기해서 성호 스스로 먼저 얘기하게 할껄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양수리에 도착할 때쯤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있었다.
"차에 좀 앉아 있을까? 아니면 커피마시러 들어갈까?"
어디서 얘기하는 게 좋을까...감동한 성호가 기습적으로 키스라도 한다면, 차라리 차안이 괜찮지 않을까?
"차에 잠깐만 앉아 있지 뭐."
성호는 창문을 살짝 내리고 담배를 꺼냈다.
"한 대 피워."
-헉...키스할 텐데 담배를 피우려고? 얘가 내 첫키스를 망치려 하다니...
수아는 얼른 담배갑을 낚아챘다.
"야, 공기도 좋은데 잠깐 이대로 있자. 창문도 활짝 못열자나."
"왠일이래, 담배를 다 마다하구?"
성호가 장난스레 빙긋 웃는다.
그래...인물로 보나 몸으로 보나 배경으로 보나 '그'보다 성호가 훨씬 낫다.
-성호가 나한테 호감을 비치며 다가올때 왜 내 짝사랑 얘기는 해가지고...이렇게 어려운 상황까지 끌고 왔는지 참 어이없고 화가 난다.
그래도 너가 1년을 참아온 덕을 이제야 보게 되니 그나마 다행 아니겠니?
"성호야."
"응"
"나, 너한테 참 고마워."
"뭐가?"
성호가 생뚱맞다는 얼굴로 날 바라본다.
"사실 형이 일본으로 떠나고 참 많이 힘들었자나."
아니다...이 순간에 왜 또 '그'란 말인가. 실수다.
"아, 그 10년?"
성호는 늘 '그'를 10년으로 부른다.
"이제 10년에서 끝내려구."
"어? 너 정리하기로 한거야?"
성호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다.
-그래, 임마. 이제 널 받아줄께. 그러니까 차라리 이쯤에서 니가 적극적으로 나오는게 어떻겠니?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좋은 사람이라도 생긴거야? 너가 그랬자나. 1시간이라도 10년 생각 안나게 해주는 사람한테 가겠다고. 누구야? 언제 생겼어?"
-얘가...지 이름 나올때 까지 시침땔 생각인가?
"내 마음에 다른 사람이 더 크게 자리잡은 거 같애."
"이야...축하한다. 누구야? 나도 아는 사람이야?"
-이쯤되면 성호가 날 놀리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정말 몰라, 김성호?"
"...?"
순간 당황한 기색이 성호의 얼굴을 스쳐간다.
성호는 수아 손에 있는 담배갑을 가져가 한 개피를 꺼냈다.
매캐한 연기가 창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차안을 맴돌기 시작했다.
"수아야...혹시...나야?"
-혹시 나라니...그럼 너말고 요즘 내가 만나는 사람이 있기를 했니?
"너...나한테 좋은 감정 가지고 있던 거 아니었어?"
뭔가 잘못되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