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풀이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며 가로 젖고는 눈시울을 닦았다.
"하지만 이제 점점 준비를 하여야만 하는 데, 환자도 자신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제 생각에는 그냥 두는 것이 좋을 듯 싶네요. 채원이가 떠난 것으로도 충분히 힘이든데,
거기에 무거운 짐을 하나 더 올려주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래도……. 어머니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좀더 시간을 두고보죠. 하지만 저렇게 의기소침
해서는 그 시간이 더 짧아 질 수 도 있어서 걱정입니다."
"네?"
소영의 어머니는 놀란 표정으로 이 박사의 얼굴을 보았다.
"딱히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환자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꼭 살겠다는
의지가 필요한 시기인데, 저렇게 의욕을 상실했으니 말입니다. 쯪쯪."
"그럼. 얼마나 더 줄어든 다는 것이여요."
"차이는 별로 없겠지요. 그렇지만 행복한 생각과 의욕만 가지고 있다면 병세의 악화가 빠르
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하루라도 시간이 더 길어지면 길어
졌지 짧아지지는 않을 것이란 말이죠."
"네……."
"어머니께서 좀 힘을 주시지요. 그래도 제일 의지되는 분은 어머니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렇게 채원이만 찾으니. 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네요."
"그것이 문제이기는 문제이기는 하네요."
"참 선생님이 채원이를 아신다고 하니, 드리는 부탁인데. 혹시 소영이의 말처럼 선생님께서
한번만 더 왔으면 한다고 말씀해주실수는 없을 까요. 소영이의 사정을 알고 있으니 채원이
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도 면목이 없어서요."
말을 맺고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이 박사의 눈과 마주쳤다. 그렇지만 이 박사의 표정은 미동
의 움직임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그것은 안될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도 말씀을 드렸듯이 채원이는 제 절친한 친구의 자제
입니다. 자식과도 같은 놈에게……. 이런 말을 드린다면 매정하시다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얼
마남지 않은 환자에게서 떠났다는 것이 다행인거 아닙니까?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의 차
이점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 채원이가 알고 떠났다면 살아있는 동안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를 얹고 살아가는 거 아니겠냐구요."
"그렇기는 하지만……."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한번 더 부탁을 해 볼까 생각을 했지만 염치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이 박사의 말 때문에 더욱 깊이 각인되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소영이가 원하는
채원이를 빨리 잊어주기를 바랬다. 그리고는 남은 시간동안 웃는 얼굴 행복한 기억들만
가지고 떠나기를 바랐다.
이 박사는 소영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진찰실로 발을 옮기며 고민에 빠졌다. 혹시
채원이가 떠나게 된 배경에 자신의 말이 놓여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괜히 소영이의 병세
를 말해준 것이 잘못 된 일이 아니었을까 자책도 해보았지만 그래도 채원이를 위해서 잘
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는 소영이의 부탁처럼 채원에게 전화를 걸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딱히 전화번호도 모르고 혹시 채원의 아버지에게 채원의 전화번호를 묻는 다는
것도 우습게 느껴졌다.
그렇게 병실로 돌아가는 어머니와 진찰실로 돌아가는 이 박사의 발에는 수북하게 쌓인 낙엽
만이 소영의 눈물처럼 밟힐 뿐이었다.
소영은 변함없이 울고만 있었다. 눈물샘은 말랐는 지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채원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는 끈임이 없었다. 마치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애
타게 찾듯이.
채원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 일을 해나갔다. 새로이 맡은 광고카피를 쓰느라 여전히 정신
이 없었고, 소영이와 연관된 것이라면 작은 것이라도 잊겠다는 듯 소영과 관련된 모든 것
들을 사무실이고 집이고 모두 모우고는 박스에 담아 다용도실에 쳐박아 버렸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다. 지난 시간은 지난 시간일 뿐이고, 인연도 끊어지고 나면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법.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으면서 채원도 강인해 진 것일까 냉정함과 단호함만을
그의 얼굴에서 일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