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규가 채원을 향해 말을 걸었다.
"무슨 말이야? 한참 잘자고 있는 데."
"으응. 다음시간까지 과제물 해오라고."
"임마 넌 뭐 그렇게 잠만 자냐?"
정환의 구박에 상규는 흐흐흐 웃었다.
"얌마. 나는 너처럼 침까지 흘리지는 않았어. 흔적은 남기지 않고 뭐라 하던가. 지저분
하게 잠잔놈이 말은 많아요."
"하하하하."
셋은 웃었고, 강의실을 나와 교문으로 향했다. 교문으로 가는 동안 채원은 강의 시간에
있던 일들을 말해주면서 과제물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어떻게 쓸까?"
채원은 혼잣말로 과제물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다음강의시간은 이틀 후 였는 데
먼저 과제물을 마치고 다른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방안의 모든 불을 끄고는 책상에 걸터앉아 스텐드에 의존하여 원고지 사각 틀에 낙서를
했다. 책상 귀퉁이에는 라디오가 켜져있었는 데 스피커를 통하여 감미로운 음악이 흘렀
다.
잠시 음악을 듣느라 글쓰기를 포기한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채원은 스텐드를 끄고는 라디오 소리를 줄이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속으로는 이별
을 고민하는 그 드라마 여인을 생각하면서......
며칠동안 고민은 했지만 결혼은 꿈도 아니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이라 헤어지려고 마음먹
은 사람의 모습을 그린다는 것이 채원은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따라 도서관에 자
리를 잡고 지나가는 여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보았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지금껏 보지도 못했던 그 드라마의 재방송을 보면서 무엇 하나라도 더 느껴보았지만, 단지
교수의 말을 확신하는 것 밖에 되지않았다.
'맞아. 저렇게 아름답게 포장을 해놓았으니 누군들 저런 사랑을 꿈꾸지 않겠냐고!'
노트에 낙서를 끄적이던 채원은 다시 소설 가시나무새를 뽑아들고는 몇장을 읽었다. 그
리고는 펜을 들어 메모를 남기기 시작했다.
'S·Y님에게
전 지금 심히 고민중입니다. 오늘은 가시나무새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아니 사랑의
일부분이겠지요. 도대체 결혼까지 마음먹고 살던 사람이 헤어지려고 한다면 어떤 행동을
할까? 그런 것 말입니다.
뜬금없이 무슨 얘기인지 궁금하시겠지만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과제물이기 때문에 아무
리 머리를 쥐어짜도 나오지를 않는군요. 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오늘은 이 것 때문에 고민이네요.'
메모를 남기고 채원은 다시 책을 제자리에 꽂아놓고는 도서관을 빠져나와 강의를 듣기
위하여 강의실쪽으로 걸어갔다.
얼마가 지났을까 소영이 까르르 웃으며 친구들과 도서관에 들어와서 두어시간 전공서적
을 끄적이다 채원의 메모를 발견하고는 도서관 안을 두리번 거렸다. 혹시 채원의 모습을
볼수 있을까 생각을 했지만 자리에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는 친구들에게 마찬가지
의 질문을 던졌다. 물론 연습장 귀퉁이를 이용한 글로써 말이다.
미숙은 무슨 그런 고민을 하냐고 반문을 하면서도 나같으면 그냥 짐싸들고 친정집으로
가던가 예고없이 그냥 기약없는 여행을 떠날것이라고 말했고, 진희는 와인을 한 잔 마시
며 폼나게 음악과 함께 그냥 취해서 잠을 잘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안방 문앞에 이혼서류
를 놓고 남편이 보게 해놓고 말이다. 그렇지만 밑도끝도 없이 이혼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는 서로 엇갈린 답만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그 부부가 어떤 과정이 있었으며 무엇 때문에
여자가 이혼을 결심했는 지를 모르기에 .
소영은 전공서적은 이미 접어둔지 오래고 채원의 질문에 곰곰히 생각을 하다가 메모를
써가기 시작했다.
'C·W님에게
무슨 질문이 그래요? 과정이 없이 결론을 가지고 고민을 던져놓으면 상당히 난처하게 만
드는 것 아닌가요?
그냥 서두는 빼두고 만약 저라면 그 사람과 연관된 가장 소중한 물건을 만지작 거리며
고민을 할 것 같네요. 뭐 그런 것 있잖아요. 아무리 헤어지기로 했더라도 미운정이라도
남아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쉽게 판단을 하지 못하고 고민고민 하다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 싶군요'
소영의 메모를 힐끗힐끗 쳐다보던 미숙이 다시 연습장에 글을 써가기 시작했다.
'야. C·W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옆자리의 진희도 끼어들어서
'맞아.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C·W? 많이 귀에 익은 단어인데. 그게 뭐야?'
'응. 그 사람 이름의 약자라고 하던걸.'
'그래? 호호호. 그게 뭔지 생각이 났어.'
미숙의 메모가 끝나자 다급하게 진희가 다시 썼다.
'그게 뭔데?'
'모르냐? 화장실. 그거 안봤어? 화장실 앞에 C·W.'
소영이 실망한 표정으로 미숙의 글에 답을 했다.
'남의 이름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하면 어떻게해. 그리고 화장실은 C·W가 아니고 W·C야.'
소영의 글이 끝나자 미숙과 진희는 도서관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큰 목소리로 웃고 말았
고,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고는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걷는 속도는
빨랐지만 나오는 웃음은 참지 못해 연신 키득키득 웃으며.
그 일이 있은 후 채원은 소영의 친구들에게 가시나무새에서 화장실로 닉네임이 바뀌어
버렸다.
다음날 채원은 소영의 메모를 발견하고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과제물을 쉽게
쓰기 시작했다
'어둠을 배경으로 여인은 쇼파에 앉아 있다. 탁자 위에는 반쯤 비어진 술병과 가득차
있는 술잔. 그리고 거실 안에는 은은하게 팝송과 적막이 함께 공존하며 흘렀다.
여인은 술잔을 들어 모두 마시고는 탁자에 놓고, 오른 손으로 왼 손가락의 결혼반지를
끼었다 뺏다를 반복하며 고민에 빠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은은하던 음악은 끝이나고 문득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결혼 반지를 놓고 현관문을 열어 나갔다.'
이 과제물로 채원은 교수로부터 너무 짧다는 구박과 함께 탁월한 표현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후 채원은 소영에게 고맙다는 메모를 남겼으며, 둘의 메모는 한 학기가 끝나는 무렵
까지 계속되었지만 아직도 둘은 서로의 얼굴은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채원이 아는
것이라고는 소영의 이름이 아니라 영어약자 S·Y였으며, 소영 또한 채원 이름의 영어약자
C·W뿐이었다. 다만 채원의 과제물 고민을 덜어주며 글과 관계된 학과라는 것을 곁들여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