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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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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그 끈을 놓다 1-4


BY 푸른배경 2003-10-09

채원에게는 고등학교 시절 희수라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처음미팅에서 만난 그녀. 그녀는 등을 덮을 정도의 긴 머리카락과 작고 하얀피부에 상커풀 없는 얼굴이 참으로 조화를 이루웠지만 입술만은 창백했다.
  채원은 그녀의 창백한 입술이 마음에 들었었다. 처음은 잘보이려고 루즈를 바르고 나온줄 알았기에....
  그렇지만 사귀기 시작한지 6개월이 지난 어느날 그녀의 푸른 입술이 심장병 때문인 것을 알았고. 안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를 하늘나라로 보내야만 했었다.
  채원은 광고카피를 무사히 통과시킬 수 있었다.
  "이채원! 역시 카피는 너가 딱이라니깐. 나 같은 AD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카피는 쓸수 없을 거야."
  "뭘요. 영욱선배. 제 일인걸요. 뭐."
  뒷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지만 입사 2년차로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진한 그리움과 함께, 그대 사랑과 함께...... 쵸코렛...... 자식 정말 카피는 잘 쓴단 말이야."
  영욱선배는 멀어지면서 채원의 귓가에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읇조리며 지나갔다.
  퇴근을 하기 전에 채원은 근태계를 제출했다. 단 하루만의 휴가. 명녀에게 말은 꺼내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생각할 시간이....
  뭐 생각을 많이 한다고 말이 술술나올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깨어있는 몇 시간 동안 혼자서 사색할,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선술집에 들러 적당히 취기가 오를 정도로 술을 마신 후 전화번호를 눌러 태욱을 불러 한 잔을 더 걸친 후 집에 들어갔다. 오늘따라 낯선 현관과 너무 넓어 보이는 퀸사이즈의 침대. 채원은 베개닛에 얼굴을 묻고 아주 작게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11시. 채원은 평소보다 4시간이나 늦게 일어났지만 침대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운 듯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까지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더니 30분 정도가 지나서야 침대에서 내려왔다. 주방으로 향한 채원은 속이 쓰린 듯 인상을 써보았지만 결국은 전기포트에 물을 얹고는 싱크대에서 해바라기가 그려진 잔을 들었다가 다시 놓고는 투박한 도자기 잔에다 커피 두 스푼, 그리고 설탕 한 스푼을 담았다.
  "그래. 이 잔하고도 이제 이별 연습을 해야겠는 걸! 이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을 지금까지 뭐가 그리 소중하다고 여겼던 것인지. 인연이 닿으면 헤어짐도 찾아오는 것인데."
  해바라기 그림의 잔을 들더니 베란다로 나가 망치로 깨트린 후 주워담아 휴지통에 쳐박아 버렸다. 소영이가 지나친 커피는 몸에 해롭다며 자스민 차와 함께 선물한 잔이었는 데, 채원은 쓴 웃음으로 뒤로한채 커피잔을 들고 홀짝이며 들이켰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즐비한 길을 지나며, 사각사각 발에 밟히는 느낌이 좋은 듯 인도를 벗어나 낙엽이 많이 쌓인 흙길을 밟으며 병원에 오르고 있다. 그렇지만 병원 입구에 들어서자 다시 채원은 머뭇거리며 국화꽃으로 둘러싸인 벤취에 앉아 한 개피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래도 좋은 사람인데. 소영인는....'
  속으로 생각하며 지난 기억들을 다시 가슴에 담듯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소영이의 병실이 있는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얼마가 지났을 까? 채원의 발 밑에는 일곱 개피이 꽁초가 뒹굴고 있었고, 비어있는 담배각을 그 옆에 꾸깃하게 접어 그 옆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마치 꽁초가 빈 담배각을 부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이제 왔어."
  반갑게 맞이하는 소영이와는 다르게 채원의 얼굴은 무뚝뚝함이 소나기처럼 쏟아졌고, 무거운 반응에 소영이는 어쩔줄 몰랐지만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을했다.
  "채원씨. 또 장난치는 거지! 좀 인상쓰는 장난은 그만 좀 해라. 예전에는 내가 심각하게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너무 익숙해져서 속아주려고 해도 이젠 웃음이 먼저 나와서 안되겠다. 피식."
  "자식. 내가 얼마나 인상을 썻다고 그래. 점심은 많이 먹었어?"
  "응. 빨리 좋아져서 퇴원하려고. 그래야 우리 채원씨 괴롭히면서 살지. 난 퇴원하면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할껀데 괜찮지."
  "........"
  "왜 말이없어. 여기봐봐 목록을 이렇게 많이 적어놓았다고."
  "전생에 무슨 굶어 죽기라도 했냐? 먹을 거 타령이게."
  "정말 오늘따라 이상하네. 인상은 쓰고 말은 딱딱하게 던지고 나 기분 나빠질려고 그래."
  "뭐가. 평상시처럼 행동하는 건데. 니 기분이 오늘 안좋은가 보지. 모든 걸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병실문이 빼꼼히 열리며 소영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 채원이 왔니."
  "네, 안녕하세요. 저번에는 뵙지 못하고 가서 죄송해요. 바쁜일이 있어서."
  "뭐가 죄송해. 나야 고맙지. 채원이 덕택에 친구들과 수다두 떨 수 있었으니. 그런데 오늘따라 얼굴이 수척해 보인다."
  "어제 술을 많이 먹었거든요."
  "맞어. 그러면 그렇지. 술이 아직 들깨서  오늘따라 기분이 무거운 거구나?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아니라니깐. 어머니 오늘따라 소영이가 과민반응을 하네요."
  "너가 이해해라. 저 놈이 나이만 먹었지. 아직도 철부지잖니. 점심은 먹었고?"
  "그럼요. 시간이 몇 시인데요."
  "그럼 마실 거라도 가져올게. 여기있어."
  "엄마. 무슨 마실거. 채원씨가 무슨 손님이야. 그냥 계세요."
  "요놈이 진짜. 채원이 말대로 오늘 좀 혼나야 되겠어."
  주먹으로 살살 소영이에게 꿀밤을 주고는 나갔고, 소영이는 조잘조잘 말을 걸었지만, 채원은 링거에서 떨어지는 수액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는 댓구를 해주지 않았다.
  "정말 이상하다. 오늘따라 조용하네. 내 옆으로 가까이 와봐."
  "너 자꾸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인상을 쓰고는 채원은 창가로 다가가 반쯤 열려진 커튼을 활짝 젖히고는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소영은 조잘조잘 거리며 채원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는 지친 듯 베개 깊숙히 머리를 누였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평양감사도 자기 싫은면 안한다던데. 그 말이 옛날 고려짝이니깐 시간이 엄청흐른 지금은 어떻겠어. 자기는 함흥차사인걸. 크크크."
  "소영아 진짜 오늘은 나 장난할 기분이 아니야."
  채원은 창가에서 뒤를 돌아섰고, 눈물이 주르륵 볼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렇지만 오후의 태양을 등진 모습에 소영은 눈이 부셔서 잠시동안 채원의 눈물을 보지 못했다.